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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를 잡을 때 가장 중요한 것

by 이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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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를 잡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바퀴벌레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최근 엄청 큰데 민첩하기까지 한 바퀴벌레를 무찌르고 나서 한 생각이다.

바퀴벌레를 마주친 건 모임 아지트였다. 한참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데, 엄지손가락 한 개 반 정도 되는 길이의 검은 존재가 긴 더듬이를 쫑긋한 채 천장을 가로지르며 등장했다. 시야 초점 밖에서 움직였음에도 너무 크고 빨라서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일까, 간식으로 먹으려고 꺼낸 복숭아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까? 나 혼자였다면 못본 척하고 바로 도망쳤을테지만 여자친구와 함께여서, 바퀴벌레를 못본 채 문을 닫고 도망치는 선택지는 없었다. 주택에 오래 살아서 벌레를 잘 잡는다며 문 닫고 나가있으라던 여자친구는 이 바퀴벌레가 날아다닌다며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도망칠 수도 없고, 어쨌든 내가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확실해지니 잡으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의 손에 들린 전기파리채를 뺏어, 천장 구석에 숨은 바퀴벌레를 쳐서 떨어뜨리고 한바탕 사투 끝에 잡았다. 두 사람을 공포에 빠뜨린 실체를 무찌르는 일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바퀴벌레보다는 내가 크고 힘도 세다. 바퀴벌레에게 나를 물어 죽일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이 있는것도 아니다. 꽤 빠르긴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밟거나 으깨면 바퀴벌레는 확실하게 죽는다. 새까맣고, 생긴 걸 보면 본능적으로 무섭게 느껴지고, 여러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민첩하게 기어다니고, 이런 요소들 때문에 괜히 겁을 먹는 것이다. 사실은 나를 어찌할 수 없고 마음만 먹으면 없애버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한데 말이다. 엄청 큰 바퀴벌레를 잡고 나서인지 그 뒤로 더 작은 - 그러니까, 보통 사이즈의 - 바퀴벌레를 두어번 마주쳤는데, 그전 같았으면 흠칫하거나 빙 돌아서 갔을텐데 이젠 별 감흥 없이 여유롭게 해치워버렸다. 훨씬 큰 녀석을 만나고 나니 작은 녀석들은 싱겁게 느껴져서일까.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의 실체가 꽤 위협적이지 않으니, 나의 무서움은 실질적인 위협 때문이 아니라 그냥 관성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 같다.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 생각은 바퀴벌레인 것이다. 생각에 얽매여 고통받고, 시달리고, 하루를 망치고 마는데, 결국 나를 얽매는 것은 그런 생각이 가진 힘이 아니라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 마음 속에 차오르는 나 자신의 힘이다. 그런 생각은 나를 어찌하지도 못하고, 방법만 깨달으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존재다. 물론 바퀴벌레가 하나도 안 무섭다는 뜻은 아니다. 바퀴벌레 약을 뿌리러 다시 방문한 아지트의 방문을 열 때, 사람만한 바퀴벌레가 있는 상상을 한 걸 보면 아직 바퀴벌레가 무섭다. 조그마한 바퀴벌레를 만나면 여전히 흠칫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안다. 내 공간에 자리잡은 까만 녀석을 그냥 모른체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손쉽게 잡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종종 되새겨야겠다. 바퀴벌레를 잡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바퀴벌레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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