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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ythewind Nov 10. 2019

<출근길의 주문>을 읽자마자 세 권 더 주문했다.

이 책을 몰라서 못 읽은 여성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다혜 기자의 오랜 팬이다. 소화하고 계신 수많은 스케줄과, 기자라는 본업과, 그 외의 기고 및 팟캐스트 진행, 내가 읽는 속도보다 빨리 나오는 신간을 생각하면 몸이 열 개이신 건 아닐까 늘 궁금했는데 실제로 뵙고 보니 나처럼 몸 하나,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인 분이었다.


<출근길의 주문>에 맞춰 생각해내신 것이 분명한 "Work Long  & Prosper! 오래오래 계속해주세요!"라는 멘트가 적힌 사인을 받았다. 책을 빌리지 않고 사길 잘했어. 그리고 살아있길 잘했어. 동경하던 분과 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인을 받았잖아. 그 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책 소개를 처음 봤을 땐 빌려봐도 되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님을 뵐 기회가 생기면서 사인을 받으려고 재빠르게 구입했고, 사인을 받고 나서 다 읽은 후 곧바로 세 권을 더 주문했다. 소장해야하는 책이고, 주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은 책이다. 프리랜서 동료, 퇴사한 친구, 곧 퇴사하기로 결정한 친구, 결혼하는 친구, 사회생활을 마악 시작하는 여자 조카들, 대학교와 대학원 후배들, 등등.
  

책은 프롤로그부터 아주 뜨겁게 시작한다. 사고로 일을 더 할 수 없게 된 여성에게 공식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정년이 따로 정해져있던 것도 아닌데 '여성은 평균적으로 26살에는 결혼퇴직을 하기 때문에 회사원으로서 미래 수입은 없다'고 판결한 것이 겨우 1983년이라고 한다. 피가 끓는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올 여름, 내가 지금 하는 일을 몇년이나 더 지금처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7년차 통역사. 시간이 흐를 수록 경험이 쌓이고 요령도 늘고 일도 많아지는 연차. 지금이야 늘 분주하게 일하고 있지만 지금부터 5년 정도가 이 커리어의 피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후 언젠가부터는 내리막이 있겠지. 집중력이 떨어지고 체력도 예전같지 않고 연륜이 긍정적이기만 하지 않은 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포트폴리오 구성을 보면 40대 중반을 넘어도 변함없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러나 2·30대 대리·과장급 실무자가 40대 이상을 고용하기 부담스러워해서, 또는 좁은 의미의 '외모 단정'을 벗어나는 나이라는 이유로 내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삼십대 후반의 통역사가 커리어를 진화시키는 방법은 기업에 인하우스 통역사로 입사해서 내부 인력이 되는 것, 통번역 에이전시를 차리는 것, 일을 하며 관심이 생긴 분야의 대학원에 진학해서 전문가가 되는 것, 교수가 되어 현업과 병행하는 것 등이 있다. 먼저 물어야하는 것은 나는 나의 커리어를  진화시키고 싶은가, 아니면 지금 하는 일을 계속 하고 싶은가, 였다. 통번역이 좋지만은 않을 때, 이 공부도 재미있을 것 같고 저 자격증도 해볼만한 것 같을 때, 저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을 때 고개를 들던 질문을 나에게 진지하게 던져보았다.


올 여름의 나에게 물었을 때 들은 답은 이렇다. 나는 강경화 장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와 비슷한 인상과 헤어스타일을 갖추고 지금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주로 삼십대 중후반인 나의 클라이언트들이, 그리고 그들의 후임자가 내가 머리가 하얘졌을 때도 컨퍼런스, 강의, 토론, 인터뷰 통역을 지금의 나에게 의뢰하듯 의뢰했으면 좋겠다. 번역 의뢰는 내가 우리말로 읽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응원하는 글만 수락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나는 그런 미래를 위해 체력 단련과 실력 다짐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자신이 있다.


하지만 흔히 통역사를 '중요한 사람을 보조하는 젊은 여성'의 이미지와 결부시키는 문화가 그 때는 완전히 사라져있을까? 나이 많은 여성, 때로는 연사보다 나이 많은 여성이 통역사인 상황을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직종을 진화시키지 않고 숙련도만 높여도 생계를 이어가는데 지장이 없을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모르겠으니 해보자.'였다.


이런 고민 끝에 다른 공부나 취업에 눈을 돌리지 말고 지금 하는 일을 계속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책을 펼쳤는데 프롤로그에 나보다 대여섯살 위인 직장인이자 작가가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언젠가 지금 우리의 나이가 되어 일하면서도 "여자인 내가 너무 나이 들어서까지 일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적어두었다. 나의 커리어가 내리막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시점으로 각오한 바로 그 나이에 도착한 작가가 내가 지난 계절에 앓았던 고민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기록을 갱신하며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주세요. 거기에 길을 만들어주세요. 시야 안에 머물러주세요."라고 프롤로그를 맺는다. 나는 여름에 나를 위해 내렸던 잠정 결론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구 한 사람만 앞에 있어도, 한 명만 눈에 보여도, 그 길을 선택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이 후 책은 그렇게  '계속하기로 한 여성들'에게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그 때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지금 알게 된 이야기를 건넨다. 아쉽게도 '내가 해보니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약을 파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나올 때는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 돌아보니 작가 눈에 보인 것을, 경험과 고민 끝에 정리한 생각을, 더 나은 생존방안 추천을 지금 그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공유할 뿐이다. 이걸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아마 도움이 될거에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도움이 된다면 내가 참 기쁘겠습니다. 이건 나도 아직도 어리둥절한데 현실이 이래요. 앞으로 차차 나아지겠죠? 나는 내가 도착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인 '계속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의 자리가 어디든 계속해주세요.


오늘 내 눈을 의심하게 한 기사를 읽었다. 2012년 A씨가 국정원이 여성 직군 정년을 43세로 정한 것에 대해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라고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담은 오늘자 연합뉴스 기사였다. 1심 원고 패소, 2심 원고 패소. 그러나 대법원은 "사실상 여성 전용 직렬로 운영돼온 전산사식 분야의 근무상한연령을 남성 전용 직렬보다 낮게 정한 데에  합리적 이유가 있는지는 국가정보원장이 증명해야 하고, 이를 증명하지 못한 경우 국정원의 연령 규정은 남녀고용평등법과 근로기준법에 위반돼 당연무효"라고 판시했다. 오늘 2019년 11월 10일자 연합뉴스 기사다.


1983년의 소송은 2019년에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명문화, 가시화가 되지 않아 발견도 교정도 되지 않은 일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더 만연할 것이다. 2020년이 두 달 남은 지금도.


오래오래 계속해주세요, 라는 작가의 외침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이 책은 작가가 독자보다도 자신을 위해 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책일 것이다. 작가 본인이 계속하기 위해서. 우리 앞에 있는, 우리 뒤에 오고 있는 다른 여성들이 계속하는 것이 작가의 계속함과 연결될 수밖에 없으니까. 모든 계속하는 여성을 응원하는 것이 결국 작가 자신을 응원하는 것이니까.


이 책을 몰라서 못 읽은 여성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출근길의 주문>, 이다혜 지음,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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