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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Aug 15. 2021

눈치의 여왕

안데르센 동화 <눈의 여왕>을 재창작함

눈치를 엄청 보는 여왕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신하들이 속으로 비웃지 않을까, 저런 행동을 하면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북적이는 왕궁이 싫었던 눈치의 여왕은 북쪽 지방의 한적한 별궁으로 떠났습니다. 왕궁은 여동생한테 맡기고 말이지요.


새로 여왕이 된 여동생은 눈치의 여왕과 달리 뭐든 자기 뜻대로 하려 했고, 자기 뜻에 어긋나면 마구 눈총을 쏘았습니다. 그래서 눈총의 여왕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여왕에게 아첨 잘하는 신하가 커다란 거울을 가져다 바쳤습니다.


“폐하, 이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옵니다. 마음이 곧은 사람은 아름답게 비추고,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흉측하게 비춘답니다.”


아첨꾼 신하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사실은 마음이 곧은 사람은 흉측하게,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아름답게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자신을 본 눈총의 여왕은 기뻤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거울을 바친 신하를 총리 자리에까지 앉혔습니다.


“모두 이 거울 앞으로 와서 자신을 비춰 보도록 하라. 너희가 왕궁에 머물러도 되는지 거울이 알려줄 것이다.”


눈총의 여왕은 왕궁 안의 사람들에게 명했습니다. 바른 소리를 하는 신하들과 착한 시녀들과 부지런한 요리사들과 정직한 창고지기와 용감한 경비병들이 거울을 보고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거나 뒷걸음질했습니다. 눈총의 여왕은 그들을 몽땅 내쫓았습니다. 왕궁에 빈자리가 생기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중에는 마음씨 착한 청년 카이도 있었습니다.


“내가 왕궁 경비병이 돼서 급료를 타면, 맨 먼저 게르다 너한테 예쁜 옷을 선물할 거야.”


“고마워, 카이! 옷 선물이 아니더라도 꼭 경비병이 되길 바라.”


게르다의 응원을 받은 카이는 왕궁을 향해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그러다 왕궁 문 아래서 돌개바람을 만나 눈에 흙먼지가 들어갔습니다. 카이는 온통 눈물범벅이 된 낯으로 입궁했고, 곧 거울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는 터라 거울을 보고도 엉덩방아를 찧거나 뒷걸음질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경비병으로 뽑혔습니다.


카이는 열심히 경비를 섰습니다. 하지만 다른 경비병들은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신하들과 시녀들과 요리사들과 창고지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으른 데다 딴짓까지 했습니다. 뇌물 받고, 헐뜯고, 식재료 빼돌리고, 창고의 물건을 축냈습니다. 이런 와중에 야간 순찰을 돌던 카이가 총리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괴상한 웃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카이는 문을 살짝 열어서 방 안을 엿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게르다를 만나 간밤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총리가 거울 앞에 서서 웃는데, 거울에 글쎄, 온몸이 시커멓고 이마에 뿔이 돋은 악마가 비치고 있더라고. 총리가 그러는 거야. ‘이 거울로 왕궁 안을 나쁜 놈들 소굴로 만드는 데 성공했어. 이젠 왕궁 밖도 나쁜 놈들 천지로 만들어야지.’라고.”


“세상에나, 악마가 사람으로 둔갑한 거였네.”


카이와 게르다는 악마로부터 왕궁과 세상을 구할 방도를 고민했습니다. 둘이 찾아낸 답은 눈치의 여왕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르다는 당장 짐을 챙겨서 길을 나섰습니다. 카이는 왕궁 경비를 서야 했기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이봐요, 이 늙은이 좀 도와주구려.”


여러 마을을 지나온 게르다가 산길로 막 접어들었을 때, 한 노파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게르다는 산중에 있다는 오두막까지 노파를 부축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길을 가려 했지만, 오두막 안에 들어찬 쓰레기와 짐 따위를 못 본 척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팔을 걷어붙인 게르다 덕분에 깨끗해진 오두막을 둘러본 노파가 말했습니다.


“언제든 다시 찾아와요, 신세를 갚을 테니. 이래 보여도 내 마법을 좀 쓸 줄 안다우.”


노파한테서 꿀 한 통을 선물로 받은 게르다는 산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여러 봉우리와 계곡을 지나 북쪽 숲에 이르렀을 때, 곰에 쫓겨 나무 위로 피신한 사내를 보았습니다. 게르다는 멀찍이 떨어진 나무와 바위에다 꿀을 잔뜩 뿌렸습니다. 곰이 단내 나는 곳으로 옮겨간 사이, 나무에서 내려온 사내가 말했습니다.


“덕분에 살았소. 난 이 숲에 사는 산적이라오.”


게르다는 산적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나쁜 관리들의 재물만 빼앗는 의적이라는 걸 알고 안심했습니다. 다시 길을 가려는 게르다에게 산적이 말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 숲으로 오시오, 은혜를 갚을 테니. 내겐 부하들이 많다오.”


산적에게서 부싯돌과 기름주머니를 선물로 받은 게르다는 깊고 어두운 숲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벌판을 건너 마침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별궁에 도착했습니다. 게르다는 궁 안으로 들어가 눈치의 여왕을 찾았습니다. 여왕은 커다란 방에서 쓸쓸히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왕에게 다가간 게르다는 간의 일들을 고하고 왕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습니다.


“혼자서 예까지 온 용기가 가상하다만, 왕궁으로 돌아가긴 어렵겠구나. 총리가 보낸 얼음 괴물이 막아설 테니까.”


여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걸음 소리가 쿵쿵 들려왔습니다. 게르다는 벽난로 안에 숨었습니다. 잠시 뒤, 크고 못생긴 얼음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괴물은 코를 킁킁대더니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다 게르다를 발견하곤 벽난로 안으로 기어들어 왔습니다. 게르다는 재빨리 굴뚝을 타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게르다를 뒤쫓다가 굴뚝에 낀 괴물이 말했습니다.


“어이, 넌 어째서 굴뚝을 잘 타는 거지?”


“이걸 몸에 발라서 그래. 너도 한번 발라보렴.”


게르다는 기름주머니에 든 기름을 밑으로 쏟았습니다. 괴물은 기름을 몸에 발랐습니다. 그 틈에 굴뚝 밖으로 나온 게르다는 치맛자락을 조금 찢어서 부싯돌로 불을 붙인 다음 굴뚝 안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곧 어마무시한 괴성과 함께 뜨거운 연기가 굴뚝 위로 치솟았습니다. 괴성과 연기가 사라지자 다시 굴뚝을 타고 내려온 게르다에게 눈치의 여왕이 말했습니다.


“사람들 눈치나 보는 내가 왕궁으로 돌아간들 무슨 도움이 될까 싶구나.”


“백성들에겐 눈총 쏘는 여왕보다 눈치 보시는 여왕님이 백배 낫답니다.”


게르다의 말에 용기백배한 눈치의 여왕은 당장 길을 나섰습니다. 북쪽 숲을 지날 때, 산적과 그 부하들이 게르다의 요청으로 동행했습니다. 또한 산중 오두막에서는 노파가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지날 때마다 불어난 무리가 왕궁 앞에 이르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궁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카이였습니다. 게르다가 달려가 카이를 끌어안았습니다.


왕궁 안으로 밀고 들어간 무리가 경비병들과 싸우고, 본색을 드러낸 악마랑 노파가 불과 물의 마법을 겨루는 동안, 눈치의 여왕은 눈총의 여왕에게로 다가갔습니다. 눈총의 여왕은 눈치의 여왕을 물러서게 하려고 거울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거울 따위에 의지해서야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이냐?”


눈치의 여왕은 거울을 빼앗아 창문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눈총의 여왕은 거울을 붙잡으려다가 추락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거울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 악마도 먼지로 화해서 스러지고 경비병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왕궁을 되찾은 눈치의 여왕은 산적들에게 경비를 맡기면서 카이를 경비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신하와 시녀와 요리사와 창고지기도 새로 뽑았습니다. 노파는 산중 오두막으로 돌아갔고, 총리 자리는 착하고 지혜롭고 용감한 여인의 몫이 되었습니다. 총리 게르다의 보필을 받은 눈치의 여왕은 백성들의 뜻을 살피며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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