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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Jul 22. 2019

합의의 연속

함께산다는 것은 합의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 생에 ‘편한 연애’ 혹은 ‘편한 살림’ 따위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인터넷에서 공유되고 있는 수많은 연인, 부부들의 크고 작은 논쟁들을 모두 겪고 가야 할 운명인 거다. 나는 아니겠지, 이 남자는 아니겠지, 하는 것들은 나의 큰 착각을 깨우쳐 주려는 듯 매번 실제로 다가왔다.


함께 살기 시작한지 어느덧 5개월이 되었다.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 까지 함께하는 생활에 제법 적응한 듯 하면서도, 때때로 혼자 살던 습관들이 튀어 나와 서로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각자에게 깊게 배어있는 습관이 충돌할 때면 더욱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 동안 몇 가지 합의가 이뤄졌다. '이렇게 하자'하는 약속, '그렇게 살지 말자'는 다짐으로 우리의 생활과 공간에 규칙들을 정립한 것. 앞으로도 많은 규칙들이 생길거다. 본격적으로 결혼식을 준비 할 때, 몇 년 후 자녀 계획을 할 때, 출산 후 육아와 자녀 교육에 대해, 그리고 살림 경제에 대해. 무수히 많은 논쟁과 대화가 뒤섞인 가운데 하나 하나 합의를 해 나가야 할 생각을 하면 조금은 머리가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합의의 과정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어느 한 쪽의 가치관과 삶의 로망을 희생하게 할 수 없고, 다른 한 쪽의 가치관과 선택이 마냥 옳다고 할 수 없으므로. 논쟁과 대화, 그리고 그 끝에 일종의 합의가 있는 것은 나와 이 남자가 연애를 해온 일련의 과정이었으며 서로를 존중한 방식이었다. 앞으로는 이 합의에 공존에 대한 배려와 양보가 더해지겠다.


함께 산다는 것, 한 가정을 꾸리고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 나가는 과정은 합의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진을 찍는데 씬스틸러 처럼 나타나는 것은 합의에 없었다.




기대수준과 최선의 격차를 아는 것

언젠가 SNS에서 유행하던 글을 보았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기준과 기대 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리거나 맞추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불가능이라고 단언하기 보다는, 성공적으로 변화를 이뤄내는 것에 '불가능에 가까운'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원하는 기준과 기대 수준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완벽한 남편에 대한 이상형에 부합하는 남편(혹은 남친)은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가 아닐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는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그런 존재. 친구의 남편, 지인의 남편이 그런 이상적인 존재일 수 있겠지만 결국 그들의 생활 실체를 들여다 보면 반드시 완벽하지만은 않을거다. 나름의 힘든 사정을 가지고 있지만, 타인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을 확률이 크다.


어쨌거나,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기준과 기대 수준이 어느 정도냐는 거다. 드라마나 로맨스 소설 주인공과 같은 수준을 기대한다면, 정말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원하고 기대하는 정도를 마냥 낮출 수는 없다. '낮춘다'는 것은 '현실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만큼 생활의 만족도나 행복감을 떨어 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원하는 기준, 기대수준과 상대가 할 수 있는 최선 사이의 격차가 얼마나 되는 지를 '현실적으로' 파악해야 하는게 중요한거다.


나는 성격이 좀 못된 구석이 있어서, 이 격차를 인정하는 것을 싫어했다. 주변에 비교대상이 너무나 많았고, 하필이면 그들은 너무나 우수한 남편들이었으며, 안타깝게도 나는 자존심이 너무 셌다. 나의 남편(예정)이 남들보다 우수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될 일이었다. 나의 남편(예정)도 다정하고 스윗한 사람이어야 했고, 가사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했으며, 함께 보내는 시간을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현실은 달랐다.




고집스러운 현실 외면

나의 현실은 참 단순했다. 남편(예정)은 너무나 바빴다. 그저 바빴다. 공휴일도, 주말도, 아니 평일의 저녁도 없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사업을 일구고 있는 사람이었고, 최근 신규 사업으로 한 층 더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에 지난 어느 때 보다도 더 바빴다. 남편(예정)의 사업을 돕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와 이 남자는 둘 다 까칠하고, 고집이 셌다(ㅋㅋ). 항상 원하는 바가 명확했고, 그것을 아주 뚜렷히 주장했으며, 서로를 설득시켜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에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이런 우리 둘이 6년을 넘게 연애했다는 것도 신기했고, 나아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기적과 같았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사실 둘의 성격 덕분에(?) 서로가 원하는 바를 파악하고, 합의의 여지를 확인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바쁜 와중에 함께 스윗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가능했겠으며, 귀가 시간이 자정을 넘기지 않으면 다행인 이 남자에게 가사를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심이 많아서, 이런 현실 위에 나의 로망을 더하고 싶었다. 현실을 굉장히, 잘 알고 있음에도 인정하기 싫었던 거다.


지금 이 시기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신혼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신혼이라는 것은 결국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신혼은 함께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며 느끼는 어색함과 풋풋함, 매일 얼굴을 보며 평범한 보통의 날과 여러 이벤트들을 온전히 함께 공유하기 시작한 낯섦이 자아내는 분위기다. 비록 내가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어도, 함께 살기 시작한 지금이 신혼인거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진 신혼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신혼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시간이나 자녀의 유무보다 풋풋함과 낯섦이 익숙해졌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나 자녀의 유무로 신혼을 구분하면, 딩크로 살겠다는 부부들은 죽을 때 까지 신혼일까) 그래서 고집스럽게, 이 남자의 최선을 외면했던 거다.








서로의 불만을 아는 것

함께 살기 시작한 지난 5개월은, 슬프게도 올해 사업 중 가장 바쁜 시기와 딱 맞아 떨어졌다. 나도, 남편(예정)도 모두 사업에 몰두하고 있던 탓에 집안 일은 뒷전이 되고, 채워져 있어야 할 가전이나 가구가 빈 상태로 오래 이어졌다. 저녁 늦게 되서야 집에 돌아왔고, 소음 항의가 들어오지 않을 아슬아슬한 시간에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깔끔한 것, 공간감과 여백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집을 정돈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분리수거를 해 달라, 청소를 해 달라는 말이 이 남자에게 잔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사를 준비하며 가사에 대해 분담을 한 것 같은데 어느 새 부터인가 대부분의 것들을 내가 하고 있었다. 처음엔 불만스럽지 않았다. 워낙 바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아쉬운 쪽이 결국 몸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 것이 짜증으로, 불만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순간이었다. 퇴근 길에 오늘은 어떤 집안 일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며 발걸음이 빨라지던 순간부터.


내가 더 많이 해서가 아니라, 집안 일 때문에 조급해 지고 불안해 지는 것이 싫었다. 시간에 쫓기듯 퇴근하며 해야 할 집안 일을 가늠하고, 그것이 많을 땐 다 하지 못할까봐 조급해 하는 모양새가 싫었다. 집안 일을 해 내도 답답한 것은 여전했다. 청소도, 빨래도, 정리정돈도 내가 도맡아 했던 탓에 남편(예정)은 물건을 잘 찾지 못했다. 항상 내게 어디에 있는지 물어 봤고, 그것이 설명으로 잘 해결되지 않을 때면 직접 찾아줘야 했다.


몸이 지치니 예민해지고 짜증이 많아졌다. 사소한 일에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지고, 말에 가시가 마구마구 돋아났다. 나도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이 남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불만이 쌓였다. 이런 모습들이 두어달 쯤 계속됐을 때, 나는 더이상 참지 못했다.







건조기를 사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사기로 합의했다. 나의 성과금 대부분이 건조기에 투자된 것은 불공정 합의다.






그래도 '합의'

결국 집안 일에 대한 부담을 토로했을 때, 생각보다 남편(예정)은 잘 받아들였다. 그는 본인이 해야 할 집안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큰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으로라도 본인이 잘 해내겠다 약속하지 못했다. 앞으로 몇 달은 더 바쁠 것을 서로 알고 있었기에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걸 알아서였을거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나을 지도 몰랐다. 솔직하게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말하고, 정말 지킬 수 있는 것으로 합의하자 했다. 여러 집안 일을 놓고 하나씩 하나씩 분담하기 시작했다.

분담의 모양새는 신기하게도 모든 집안 일에 온전한 과정이 어느 한 쪽에 맞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내가 빨래를 해서 건조를 해 두면 그가 빨래는 개는 것, 내가 분리수거와 쓰레기를 모아 두면 그가 그것을 버리는 식이다.


이대로 모든 가사에 대한 합의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상황이 바뀌면 그 때는 그 때 대로 서로의 최선에 맞게 합의해 나갈테다.


나와 이 남자는 가사 노동 뿐 만 아니라 갖가지 합의들을 만들어 왔다. 양가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범위, 서로 다른 생활 습관에 대한 합의, 공동 생활비의 사용 범위 같은 것들. 어쩌면 합의라기 보다 논의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합의'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서로 배려하는 것들에 대해, 서로 양보하고 시간을 더 들여 공을 들이는 것을 더욱 존중하고 귀중하게 여기자는 이유에서다. '합의'라는 어감이 썩 좋지는 않으나, 알게 모르게 이 단어가 주는 엄격함과 냉정한 느낌에서 상대의 배려와 노고를 엄격히 지켜주는 느낌이 있다.



함께 산다는 것, 참 어렵다. 서로 다른 것들이 더욱 가까이,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을 서로 맞춰나가는 과정도, 둘이 만족하는 규칙이나 약속을 정하는 것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약속들이 중요한 것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기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행복하자는 것엔 일방적인 희생이나 양보가 없다. 그것을 상대방이 고마워하고, 자주 표현해 준다 하더라도 희생하고 참아내는 쪽에서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 언젠가 오게 되어있다. 그 때에는 그동안의 희생과 인내, 양보에 대한 억울함이 곪을 대로 곪아 있고, 더이상 대화나 협의의 의지 조차 남아있지 않다.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그것이 무섭고 싫다.


그렇다고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미리 겁낼 필요는 없다. 작은 것에서 부터 하나씩 서로 조율하고 합의해 나가기 시작하면 중대사에 대해서도, 까다로운 일에 대해서도 서로에게 좋은 결론과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가사를 분담하는 합의, 서로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존중하되 '함께'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합의에서부터 훈련을 하는거다. 때때로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좋은 교훈을 주고 더 나은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내가 이 남자와 함께 살아가는 과정은, 합의의 연속이다.






글을 마무리 할 때 쯤,

"무슨 글 썼어?"하고 다가오더니 띄엄띄엄 읽어보고는 졸려서 자야겠다며 일어났다.


"나 이거 선풍기 가져가도 돼?"

"응"

"합의~"


"근데 나, 너무 졸려서 먼저 잠들지도 몰라"

"응, 얼른 자."

"합의~"



응.....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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