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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Jan 25. 2021

연애와 결혼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결혼했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

남편과 함께한 8년이 어느덧 내 인생의 1/3 쯤 차지했다.큰 이변이 없는 한 이렇게 줄곧 함께인 채로 시간이 흘러가겠다. 이제는 이 남자와 함께 해온 시간이 그저 내 인생의 일부 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지만, 이따금 타인에게는 무언가 대단한 시간처럼 보이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오랜 시간 한 남자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 것인지에 대해 낯 부끄러운 칭찬을 듣기도 하고, 8년간 정말 사랑하는 감정이 지속가능한지에 대해 의심을 하기도 한다.


결혼을 한 후에는 연애와 결혼이 얼마나,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인삿말이 되었다. 대체로 How are you? 하는 정도의 인사라 생각하며 적당히 good 혹은 fine, thank you 정도로 넘어간다. 그런데 정말로 작정하고 물어오는 사람들, 그러니까 결혼을 결심하기 직전에 있거나 결혼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물어볼 때면 말 문이 막힌다. 연애와 결혼이 다르지 않아 내 대답이 기대를 저버릴 것 같아서, 랄까.





어떤 감정이던 그것이 가라 앉았을 때, 나는 침착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첫 결혼 기념일을 맞이했다. 2020년을 코로나에 붙잡혀 뭐 하나 한 것없이 흘려 보낸 탓에, 벌써 1년이 되었나 싶었다. 첫 결혼 기념일은 여느 때와 같았다. 연애 4주년 쯤 되고 나서는 기념일에 혹은 앞선 주말에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는 정도로 만족했는데, 결혼했다고 해서 그것이 달라질 리 없었다. 연애 6주년, 7주년을 따지다 결혼 1주년이란 숫자를 바라보니 새삼 1이 귀여워 보여 '뭘 또 새삼스럽게 유난떠나' 싶기도 했고.


너무 무드 없나 싶었지만, 결혼을 하니 특별한 날 혹은 기념일 같은 명분이 딱히 필요하지 않게 됐다. 선물을 하는 것도, 어딘가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하는 것에도. 그저 무언가 먹고 싶은 기분이면 그것을 먹으러 갔고, 그저 생각 없이 호기심이 이끄는 곳에 끌려 갔다.


그럼에도 종종 결혼은 달라야 하지 않나,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30년차 결혼 선배인 부모님에게서 볼 법 한 편안함과 일종의 전우애 같은 것이 너무 일찍 나와 남편에게 생겨버려, 이 결혼의 수명이 일찍 다하진 않을지 하고.  연애도, 일도, 결혼도 같이 하는 까닭에 우리는 너무나 일찍 서로의 전우가 되어버렸다.


만약 결혼과 연애가 무언가 달라야 한다면, 기대하는 것은 책임감 같은 걸 까. 이 사람은 내 남편(혹은 아내)이니 내가 더 많은 영역을 책임져야 한다, 하는. 아니면 나는 아내(혹은 남편)가 되었으니 마땅히 이래도 된다는 어떤 권리감 같은 걸까.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신혼의 격정적인(?) 감정이 비로소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혹은 책임감에 피로를 느끼거나 권리감에 무료함을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이 권태기라고 오해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진정으로 이 남자가 변했다거나 감정이 다했다고 의심하지 않고 침착히 넘어갈 자신이. 그래서 연애와 결혼이 다르지 않았으면 좋겠고, 어떤 감정의 변동성이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결혼한 것을 잊었다

사랑에서 오는 설렘, 감동, 벅참, 간지러운 그 어떤 느낌들이 잔잔하게 가라 앉는 시기가 있다. 시시각각 요동치지 않는 감정이 일상 깊숙히 흐르며 나를 안정되게 만드는 때. 나는 그런 안정을 처음 느낀 그 때, 권태나 감정의 종말을 의심했다.


연애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때, 하루 하루 내  감정과 상태는 연애에서 결정됐다. 달달한 카톡이라도 주고 받을 때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서, 더 달달하고 싶어서 내 것에 집중하지 못했다. 싸우기라도 한 날엔 싸워서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요동치는 감정에 휩쓸려 그 순간의 감정에, 관계에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연애 감정에 붙잡혀 연애가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지 못했고, 더불어 나아가지 못했다. 무엇 하나라도 능히 해내지 못했던 그 시기의 나는, 뭐 하나라도 잘 해보고 싶었는데 그것이 당장에는 연애였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 누구나 연애에 능하지 않을 시기고 그야말로 앞뒤 안 재고 불 같이 사랑에 타들어가는 시기가 아닌가. 연애에서 이따금 상처를 받아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패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뒤바뀌는 감정을 감당할 수 있는 젊음이 있고, 뒤바뀌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배우며 감정에 따른 나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청춘을 빌미로 삼았다. 그런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비로소 일정한 정도의 감정이 단단히 자리잡아 나를 안정되게 만들었을 때, 나는 심각히 우울에 빠졌었다. 연애는 항상 설레어야하고, 항상 가슴이 들뜨는 어떤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안정기에 접어드니 그것이 권태인줄로 착각했다.


그것이 권태가 아니라고, 사랑이 다한 것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안정기에 접어들어 본 적도 처음이고 권태라고 의심해 본 것도 처음인데 어떻게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런 시기를 무사히, 건강히 보내고 안정된 것에 익숙한 지금에 감사하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이 남자와 연애하며 이룩해온 관계와 감정, 태도 등 모든 것들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 것 같다. 결혼한 이후 더욱 깊은 사랑이 생기길 바라고 그것으로 나와 남편을 더욱 행복하고 즐겁길 바라지만, 최소한 지금껏 연애를 하며 견고하게 쌓아온 어떤 것들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래서 결혼 후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대답하는 것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 남자의 익숙해진, 익숙한 모습을 매일 보며 살고 있고, 이따금 낯선 모습을 발견하며 '오, 이런 면도 있었네'하고 당황한다. 종종 나를 무한히 믿고 사랑하는 모습에 감동하고.


결국 모두들 익숙해진 상대의 모습이 좋아서 결혼하지 않을까. 매번 보아온 익숙한 그 모습이 좋지 않다면, 결혼을 저당 잡아 미래에 더 좋아질 것이라 결심하긴 힘들테니까.





익숙한 당신의 모습에서 매번 새로운 감동을 느낀다

진지하게 삐치거나 서운한건 아니고 그저 '흥'하고 놀릴 때가 있다. '흥, 미워. 이것도 안해줘.' 하고(상상금지).

그런데 이 '흥'이 이 남자에겐 참 크다. 언젠가 갑자기 "너가 '흥'하면 진짜 마음이 쿵 하고 떨어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나는 진지하게 그런게 아니고 그냥 장난처럼 귀엽게 '흥'한건데. '흥'이 아니라 '귀엽게'가 핵심이었는데. 내 딴에는 귀엽다 생각했던게 이 남자에게는 질리게 하거나 기겁하게 만드는 포인트였나 싶어 낙심했다.


이 남자는 나에 대하여, 내 표정과 행동과 말에서 흘러 나오는 모든 반응에 진심이다. 사소한 반응도, 큰 의미도, 큰 감정도 없는 투정에 대해서 모두. 가끔 '힝, 힘들어. 그냥 하루 종일 누워 있고 싶어.' 하면 '그래라' 하고는 화장실 청소며, 설거지, 빨래 개는 것을 모두 본인이 해 놓는다. 언젠가 백화점에서 가습기 앞에 서성이는 나를 보더니 은근슬쩍 본인 카드를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필요하니까, 사."하고 혼자 쌩 날라 버리고.


아, 이것이 익숙한 이 남자의 모습인데 종종 그것을 잊는다. 이 남자는 내가 본인의 사업을 도와 함께 일하고, 본인과 결혼생활을 하는 것에 참 고생한다고 미안해 한다. 내 커리어 발전을 위해서, 혹은 대가 없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고 감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나를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하고.


어쩌면 이것이 그가 결혼으로 더해진 어떤 책임감일까. 남편이 귀엽게 봐 줄 것이라는 알면서 칭얼거리는 것은 나의 권리감이고.


올해 우리 부부의 가장 큰 화제는 가족 계획이다. 결혼 기념일 1주년을 맞이해 외식을 하며,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해 대화했다.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될 지, 언제 쯤 자녀를 몇이나 낳으면 좋을 지 같은 것들에 대하여. 우리 부부는 한 번도 딩크부부를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엄마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결심과 각오가 필요했다. 남편에게는 아빠가 된다는 것이 마냥 즐겁고 재밌는 일 같이 보이지만.


몇 가지 말로 나열되거나 정의할 수 없는 '엄마되기 각오'에는 두려움이 가장 짙게 깔려있다. 엄마라는 족쇄에 갇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워 나가면서 나를 잃진 않을 지에 대한 겁이다.


"내가 만약 애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왜? 아이 낳기 싫어?"

"무서운거지."

"아플까봐?"

"그런 것 보다, 내가 나를 잃을까봐."

"엄마가 된 너를 발견하겠지."


별게 다 걱정이라는 듯이 한 번 쳐다 보고는 능수능란하게 스테이크를 썰며 "새로운 네 모습을 발견할 거야"하고 말한다. 그 와중에 스테이크를 이리저리 썰어 보다 "이거 너가 좋아하겠다."하고 한 점 밀어주는데 그게 또 진짜 맛있어서 얄밉다.

 

8년 째 나를 지켜봐온 남자는 불안한 나를 안정시키는 것에 능하다. 이 남자는 언제나 나의 미래와 가능성에 대해 나보다 더 기대하고 있다. 하긴, 그래서 내가 이 남자랑 결혼했지.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나'를 잃을까봐 걱정했는데, 이 남자는 엄마가 되어 '새로 발견 될 나'를 기대하고 있었다. 자녀를 위해 희생한 안타까운 내 모습이 아니라, 기꺼이 자녀를 위해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내 모습. 일과 육아에 치여 지친 내 모습이 아니라, 일과 육아를 어떤 모습으로든 해 내는 내 모습. 남편은 후자의 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책임감이 무척 강한 그는 나를 절대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고, 그 사실을 매우 잘 아는 나는 종종 칭얼대겠다. 이렇듯 익숙한 그의 모습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내용으로 감동을 받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담백하고 강한 삶을 희망한다

담백한 삶을 꿈꾼다. 언젠가 화려한 인생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이 쌓이며 담백한 삶의 멋짐을 발견했다. 깊은 강물일 수록 잔잔하게 흐른다고 하던가. 고요한 수면 아래로 드러나지 않는 물살은 지형을 바꿔내는 강한 힘이 있다. 감정의 평정을 유지하되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강한 내면을 가진 부부가 되고 싶다.  


그래서 결혼 2주년에도, 3주년에도, 시간이 더 흘러 20주년, 30주년이 되어도 마음이 잔잔하고 담백하게 살아가고 있길 희망한다. 담백함 속에서 한 번씩 느끼는 강렬한 맛을 느끼기도 하겠고, 담백하다 못해 밍밍해져 버릴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재밌었다'하고 웃어 넘길 수 있는 부부가 되길.




그러니까 나는 이 남자가 결혼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결혼했는데,

연애와 결혼이 정말 다르다고 능히 대답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 결혼 생활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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