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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Sep 06. 2015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던 날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언뜻 생각해 보기에는 자식을 돌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는 존재 쯤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희생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이어야 할까? 아이와 웃고 떠들다가 홀로 먼 곳을 바라 볼 때면 그 수준에 고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도 자식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인격을 갖춘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창 아버지가 필요할 때 아이와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만든 나의 선택은 정말 탁월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좀 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끔씩 무의식을 깨고 나를 고민에 빠뜨린다. 그럼 얼른 내 의식이 출동한다. "아들이  행복해하잖아!" 정말 아버지는 그래야 하는 것일까?


5살의 아들을 키우는 36살의 철없는 아빠인 나에게도 아버지는 계셨다.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사회 생활을 활발하게 하지 못하신 채, 매일 같이 걸려 오는 아들의 전화에 기뻐하고, 아들이 무탈하다는 것에 안심하신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내려가는 날이면 아버지가 자주 일을 나가시곤 했다. 일용직 형태의 페인트칠 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일이 생겨야 그 현장에 가서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내려오는 날이면 '복(福)'이 와서 일이 늘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들어 오시면서 늘 말씀하신다. "너가 온다고 하면 늘 일이 생긴다."


 1945년 해방 한 해 전에 일본 어딘가에서  출생하셨다는 아버지는 해방 직후 할아버지와 한국을 건너 올 때, 상당히 많은 돈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불이 나면서 순식간에 돈은 잿더미가 되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웃을 전전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시면,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철도청 공무원이라도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이들을 풍족하게 키우지 못한 것에 한을 가지고 계신다. 모두가 어려운 통이라 초등학교는 사치였을 것이다.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한글이 학력의 전부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각종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겨우  유지하다가 도장공(페인트칠)이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그나마 안정을 찾았고, 그 무렵 나를 낳았다고 한다.


한 때 나는 아버지가 참 부끄러웠다. 특히 학교에서 가정조사를 하는 설문서에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할 때가 더욱 그러했다. 아버지의 학력은?... 아버지의 직업은?... 한창 사춘기를 거칠 무렵 아버지는 어느새 '중졸'이 되어 있었고, '건설업 현장 소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지만, 고졸과 대졸이 많았던 친구들의 부모님... 그리고 번듯하게 회사원이라고 적는 친구들의 당당함 속에서 솔직하게 가족을 드러내는 것이 힘들었다. 이 점이 늘 아버지께 죄송스럽다.


지난주 비행기에서 영화 <국제 시장>을 다시 보면서 주인공 '덕수'를 통해 아버지를 떠올렸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영감 '덕수'를 만든 것은 그의 지난 인생이었다. 동생들을 위해 서독 광부로 나서고,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그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꽃분이네를 팔고 조용히 살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피난 중에  잃어버린 동생 막순이를 찾아 나선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장소가 '꽃분이네' 였기에 그는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마지막까지 그 곳을 사수하려고 했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 조차도 덕수의 이런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 덕수는 고집불통 영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도 자라면서 아버지에 대해 영화 속 '덕수' 주변 사람들 수준의 시각밖에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때로는 너무 고집불통 아버지였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버지의 지난 과거가 너무도 잘  이해된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면서 한 번도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던 내가 이번에 '국제시장'을 보면서 펑펑 울었다는 사실 말이다. 


학창 시절에 나는 그다지 문제아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초반에 상당히 공부를 못했다는 점을 빼고는 크게 흠 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사하고 어머니도 나로 인해 학교에 불려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학교 방문이 이뤄진다. 그것도 선생님의 요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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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란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아직까지 뚜렷한 의견을 바탕으로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렵지만, 최근의 내 행동들만 보더라도 무릇 아버지란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출장 기간 동안 잠시 아이 옷을 파는 아웃렛에 들렀다. 사실, 내 스스로 옷 가게가 들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늘 나에게 옷은 사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추위와 더위만 막아 준다면 옷은 그것으로써 제 기능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나도 아들에게 만큼은 좋은 옷을 입히고 싶었다. 굉장히 유명 메이커임에도 한국에 비해 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했기에 쓸어 담는 심정으로 옷을 구매했다. 옷을 고르는 순간에 마음은 오직 한  가지였다. "아이에게 잘 맞을까?"


아버지란 자식을 위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심정으로 무장한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기에 혹여 자신으로 인해 아이에게 상처나 피해를 줄 것 같은 행동임을 알고도 그것을 해야 할 때, 얼마나 마음 아프고 망설이게  될지  상상할 수 없다. 아마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겪고 계셨을 것이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자, 담임 선생님은 어김없이 가계조사와 함께 면담을  시작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나의 아버지가 페인트칠 관련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를 통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버지에게 새 학년 교실 페인트칠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학교 교실은 아이들이 한 해동안 생활한 공간이기에 새 학년에 올라가면 지저분한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의 아버지가 학교에 오셔서 환경 미화 작업을 좀 해주시길 바라셨다. 고민이 되었다. 친구들의 부모님은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계셨는데, 나의 아버지만 누추한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답하셨을 뿐 별 말을 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일은 백 번이라도 해 줄 수 있을 테지만, 혹여 자신으로 인해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될까 봐... 내가  부끄러워하는 심정 이상으로...


교실에 페인트를 칠하기로 약속한 날이 밝았다. 페인트칠 특성상 교실이 비워져 있어야 했다. 학교 방문 시간을 오후 늦은 시간으로 정했는데, 선생님은 작업 보조를 위해 나와 몇몇 친구들을 남기셨다. 착한 친구들이긴 했으나, 그래도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부끄러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약속된 시간에 오토바이를 타고 교무실 앞 현관에 오셨다. 그 날 따라 아버지의 복장은 유난히 달라 보였다. 평상시에 내가 집에서 많이 보던 페인트 묻은 작업복이 아니었다. 최대한 깔끔한 바지에 청잠바를 입고 계셨다. 행여나 아들이 자신의 누추한 모습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까 봐 무척 고심한 흔적이었다. 선생님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작업에 들어 갔다. 나도 옆에서 최대한 일을 도왔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버지의 일을 진심으로 도왔다기보다는 빨리 일을 끝내고 한시라도 바삐 이 현장을 빠져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친구들도 붓 하나씩을 잡고 페인트칠을  신기해하면서 작업을 도왔다. 그들에게 그것은 신기한  작업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에 나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예정된 작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아버지께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후련함과 함께 행여라도 생각 없는 아이들이 나를 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밀려 왔다. 나를 뒤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는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들에게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이 상황 앞에서 아버지는 나를 대신해 찬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를 몰고 가셨다. 지금  그때를 다시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내가 살던 순천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중3 때 고입시험을 위해 피나게 공부를 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전교생 750명 중에 50등 내에 늘 들었기에 고향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순천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역의 수재가 모인다는 이 곳은 입학 초기부터 분위기가 남달랐다. 모두가 공부에 열중하는 분위기였고, 행여라도 친구들에게 열등의식을 비추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던 1학년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밥을 먹고 친구들과 잡담을 하면서 복도를 걸어 오는데, 창문 너머로 교실 한 켠에서 작업하시는 분의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이 상당히 익숙했다. 슬쩍 옆을 지나치면서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바라 봤는데,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오늘 아들 학교에 작업을 하러 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음에도 나에게 한 마디의 언질도 주지 않았다. 불과 1년 전에 아들에게 준 상처가 되살아날까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나도 성숙할 만큼 성숙했으니 이제 그런 상처는 없다고 얘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몸은 그런 성숙 앞에서 무력히 돌아서 버렸다. 마음은 아버지에게 가서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몸이 그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비겁하게도 가던 길을 가 버렸다. 그리고 집에 가서도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눈이 본 장면은 세월의 비밀로 묻어 두는 것이 아버지의 위신을 지키는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 몰래 작업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안도하고 계셨을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식, 대학교 입학식은 물론 졸업식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학교를 찾지 않으셨다. 늘 자신의 모습이 못났기 때문에 미안해서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지 5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쯤... 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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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배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누가 알려 준 것은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20살 때부터 스스로 무엇인가를 배우고 개척해 나가는 삶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음껏 공부하고 싶을 때 끝까지 해 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폐결핵이라는 병마와 싸워 가면서 어렵사리 고3 수능 공부를 했건만, 신은 나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론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것은 잘 된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수능을 망쳐서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가져 보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지방의 한 대학에 들어 갔다. 그리그 반 년이 채 지나기 전에 내 안에 숨겨진 '한'은 '열정'이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1학년 여름방학에 '벤처기업 강좌'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보다 최소 10살 이상 많은 어른들이 듣던 강좌 였는데, 약 한 달 동안 홀로 벤처기업을 차려 보겠다고 열심히 공부했다. 방학임에도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강좌를 들었다. 아무도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킨 적은 없었다. 단지 그렇게라도 열심히 살아야 내 안에 숨어 있는 '한'이 풀릴 것만 같았다. 대학을 다니면서 그리고 훗날 취직을 한 후에도 항상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살아가고자 노력했다. 도저히 시간이 허락되지 않으면 책 혹은 단발성 강연을 통해 그 욕구를  충족시켰다. 


2008년 말. 내 나이 29살이 되었다. 엔지니어로 취직하여 사회 생활을 한 지, 어느 덧 만 4년이 다 되어가던 시기였다. 전공은 엔지니어링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경영학을 배워 보고 싶었다. 아마 대학 1학년 때 벤처기업 강좌를 통해 간단하게 회계 관련 지식을 배웠던 기억 때문일 수도 있다. 워낙 바쁜 일과로 직장 생활이 돌아갔기 때문에 2년 동안의 '경영학 석사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지만, 우선 시도해 보고 도저히 안 되면 나중에 휴학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월급으로 등록금을 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왕 시작한 것이니 내 혼자 힘으로 졸업을 해 보고 싶었다. 늘 직장은 바빴다. 일주일에 2회 정도는 저녁 7시에 시작하는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럴 때면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일을 하고 겨우 눈치를 보면서 6시에 퇴근을 해야 했다. 간간이 눈치보기를 넘어 일 자체가 꼬여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가슴이 타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저녁 식사는 운전 중에  해결했다. 신호 대기 중에 집에서 싸온 주먹밥을 먹으면서 학교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했다. 항상 저녁 수업 그리고 주말 수업 내내 업무 특성상 회사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고, 굳어 버린 머리로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더욱 고욕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은 흘렀다. 그렇게 너무도 힘든 2년이 지나 갔다. 그리고 2011년 2월에 졸업식이 열렸다.  


늘 부모님께  전화할 때는 직장 다니면서 학교 다니는 것이 별 일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정말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고욕임이 분명했다. 그런 나의 고초가 텔레파시로 부모님께 전해졌을까? 석사 졸업식이 있던 날, 아버지가 갑자기 졸업식에 오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입학식은 물론 졸업식에 오신 적이 없던 아버지였기에 의아했지만, 그래도 누군가 축하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워낙 홀로 서기에  익숙해진 몸이라 서운한 감정은 없었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들이  서운해할지 모른다고 느낀 것 같다. 기차를 타고 아버지가 대전으로 올라 오셨다. 동기들과 졸업 사진을 찍는 동안 아버지는 멀리서 나를 빤히 바라 보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석사모를 번갈아 써 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너무도 어색한 모자였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소중했다. 그 날이 내 평생 아버지를 세 번째로 학교에서 만난 날이었다.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아이들 어린이집 학예회부터 졸업식까지 부모님이 반드시 찾아 다닌다고 한다. 나의 성장 과정이 요즘의 트렌드와 동일하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거나 그러지 못해서 마음  아파했을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요즘 5살 아들이 극성이다. 가끔 너무 버릇 없는 행동을 할 때는 엉덩이를 때리게 되는 데, 나중에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사실이 너무 미안하다. 쿨쿨 자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라고 속으로 인사를 건네곤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도 나중에 아빠의 존재를 아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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