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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Sep 10. 2015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얘기 한 적 없었던 나만의 비밀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인데, 사춘기에 접어들던 무렵의 내가 겪은 이 이야기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과 같은 문제였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이야기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고 비밀은 있다고 한다.  마음속 깊숙이 숨겨 두고 외부로 발설하는 것 자체를 고통으로 아는 그런 비밀 말이다. 그런데 비밀을 꽁꽁 숨겨 놓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것을 숨기면 숨길수록 마음은 알게 모르게 상처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 상처에서  회복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놓아주는 길밖에 없다. 마음 편히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괴로워하던 무의식은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블로그를 통해 가공된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나의 인생 이야기를 쓰기도 했지만 이번 시리즈처럼 내  마음속 비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본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나도 그 비밀로부터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살아 보니 별 것도 아닌 것이었는데, 20 년 전의 나는 이것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 년 반복적으로...


 요즘의 내 흥미와 유년 시절의 나를 견주어 보면,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누가 보더라도 엔지니어 스타일이 분명했다. 거리에 버려져 있는 전자 제품을 주워 와서 새롭게 개조해 보는 것을  좋아했고, 각종 전자키트를 사서 납땜하고  동작시켜 보는 것에 푹 빠져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발전기'가 아닌가 싶다. 우연히 보게 된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었다. 자석 사이를 금속이 빠르게 지나가면 전기가 발생한다고....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말이 내 구미를 당겼다. 당장 자석을 밑에 깔고 모터를 이용해 금속을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자석의 N극과  S극으로부터 전선을 빼어서 다시 모터로  연결했다. 나의 이론에 의하면 모터는 영원히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자연계의 절대 법칙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실패를 맛 보았지만, 그 후로도 꾸준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장래 희망에는 늘 '과학자'라고 기입했다. 성인이 되어 현실에서  살펴본 '과학자'가 유년 시절에 생각하던 과학자와는 달랐지만, 어찌 되었던 나는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만들어 내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물론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잠시 꿈이 '교사'로 급선회하기는 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에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헤딩한 사건으로 인해 1학년 초반엔 상당히 바보로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약간의 교육과 시간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줬기에 그 후로는 건강상에 큰  문제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의 시력은 양쪽 눈 모두  1.2였다. 딱히 시력이 나빠질 이유가 없었던 시절이었던 같다. 그렇게 4학년을 보내고 5학년이 되었는데, 칠판 글씨가 약간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시력이긴 했지만,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공부할 때만 안경을 끼어라는 말에 안경을 벗었다 썼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눈은 조금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칠판 글씨가 좀 더 흐릿하긴 했지만,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었기에 별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성인이 된 지금도 나는 이 시절의 꿈을 자주 꾸곤 한다. 무엇인가를 보려고 하는 데 앞이 흐릿해서  괴로워하는 모습 말이다. 나의 무의식은 지금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력은 안경만 쓰면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기에 별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문제는 생각하지도 않는 곳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그 문제를 알고부터 14살의 나이에 향후 인생이  걱정되었고, 나만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중학교 1학년이던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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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이면 각급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체 검사를 실시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의 규격과 상태를 측정하는 검사인데, 일반적으로 키, 몸무게, 시력 등등 이런 저런 검사를 수행한다. 신체 검사가 있는 날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설레어한다. 왜냐하면 수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별 생각 없이 이리저리 시키는 대로 몸을 갖다 대면서 왔다 갔다 하면 금세 집에 갈 시간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푸르름이 가득 했다. 친구들과 교실 뒤편으로 나가서 무성하게 자라 있는 아카시아 잎을  만지작하면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신나게 보낼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 선생님의 호출 소리가 들렸고, 모두들 교실로 들어 와서 이쪽 저쪽을  돌아다니면서 한 해 동안 자란 자신의 몸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키와 몸무게 측정을 마치고, 시력 검사를 하는데 예전에 비해 좀 더 눈이  흐릿하다는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검사는 색깔이 섞인 종이판에 숨어 있는 숫자를 읽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번 해 본 기억이 나는 검사였기에 별 걱정하지 않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친구들은 아무 이상 없이 순식간에 통과를 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런데 친구들과 달리 내 눈은 그 숫자를 선명하게 읽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한 숫자 모양이 눈에 들어 왔다. 내가 식은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친구들의 웃음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내가 그 숫자판 앞에서 계속 망설이자 선생님은 몇 차례 기회를 더 준 후, 내 이름에 작은 '갈매기 표시'를 했다. 그 순간이 내 인생 최대 고민의 시작 포인트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눈을 들어 세상 모든 만물을 보더라도 선명한 컬러 색깔이 다 보이고, 크레파스부터 물감까지 정확히 색깔을 구분해 낼 수 있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 숫자판을 읽지 못하는 나의 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친구들이 바라 보는 컬러풀 한 세상과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정말 다른 것일까? 정말 나는 흑백밖에 구분하지 못하는 강아지 눈을 가진 것일까...


 그 당시에 시력이 좋지 않았기에 그 숫자판을 선명히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의 검사 결과를 도저히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식에 의하면, 색깔 인지 능력에 이상이 있을 시 이공계열 학과 진학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평생 운전 면허증도 따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매우 잘못된 지식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내 눈은 타인에 비해 미세하게 색깔인지 능력이 떨어질 뿐, 내가 바라 보는 세상도 모두 같은 컬러였다. 또한 색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술 계통 학과 진학 시에만 약간 제약 사항이 있을 뿐, 내가 가려던 길에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운전면허 취득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정확한 지식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내 인생 최대의 고민은 기를 펴기 시작했고, 중1부터 고2까지 약 5년 동안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철저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특히 매년 5월이 되면 나는 도살장에 끌려 가는 동물과 같은 심정이었다.


도저히 내 몸에 이런 심각한 이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다음 날 양호 선생님을 찾아 갔고, 어제 그 검사를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검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친구들처럼 '합격' 도장을 받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양호 선생님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나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검사판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는 나를 보면서 내 입에서 대답이 나오도록 기다려 주었다. 혹여 내 마음이 상처를 받을까 봐... 약간 배려하는 눈치였다. 그 날도 나는 끝내 숫자판을 읽어내지 못하고 내일 다시 와 보겠다고 이야기 한 채 양호실 문을 나섰다. 창밖으로 보이는 5월의 실록은 분명 푸르른 색깔이 분명 했는데, 그깟 숫자 하나 읽어 내지 못하는 내 눈이 너무 싫었다. 다음 날에 다시 검사를 했지만, 역시 실패. 그 다음 날도 실패. 총 3번 정도 시도를 한 것 같은데, 결과가 나를 끝없는 고민과 방황의 길목으로 이끌었다.


15살. 사춘기에 막 접어든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기도 어려웠지만, 더 두려운 것은 앞으로의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어릴 적부터 흥미를 따라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난관 때문에 모든 것을 접고 '문과계열'의 학과로 진로를 틀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에게라도 정확한 정보를 구했다면 그렇게 심적으로 방황을 거듭하면서 5년을 안 보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하다. 1년이 지나고 나는 16살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5월에 가까워 올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학교 월간 행사 게시판에 '신체검사' 일정이 정해지면 나는 다시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의 심정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모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홀로 검사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고, '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억겁의 도장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이 질환이 선천적인 문제라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부모님으로부터  유전되어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중3 생물 교과서에 유전 현상 설명과 함께 그 질환이 예시로 다뤄졌다. 비로소 내가 가진 문제의 근원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는 모두 23쌍의 염색체가 있는데, 그중 22쌍은 상염색체이고, 한쌍이 성염색체이다. 여자의 경우, 성염색체는  XX이고, 남자는 XY이다. 그 질환은 성염색체 X 위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성을 거슬러 가면서 유전되는 반성 유전'의 특징을 띠었다. 즉,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엄마'로부터 온 것이다. 과연 어머니는 아들이 이런 방황의 세월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가능하면 학교 생활에 관해서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고자 이런 문제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를 것이 분명했다. 늘, 나의 도시락을 싸면서 고생하는 어머니를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절대 그것은 아니었다.


야속하게도 모의고사 시험에는 늘 그 질환의 유전 관계를 묻는 문제가 반드시 나왔다. 어렵지 않은 문제였기에 쉽게 풀었지만, 그 문제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또 하나의 매듭으로 묶여 가는 참담함이 앞섰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고등학교에 가면  무엇하겠는가? 할 수 있는 일이 크게 없다고 하는데... 그 당시 내 생각의 바운더리는 고작 그 정도였다. 나는 16살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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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일찍부터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는가? 그것은 내 삶이 시작부터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을 의식할 만큼 성장하자 나는 당황했다. 내가 딛고 선 출발선은 아주 불리한 위치였다. 더구나 그 회의적이지 않은 삶은 내가 빨리 존재의 불리함을 깨닫고 거기에 대비해주기를 흥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내 삶을 거리 밖에 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 이면을 엿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삶의 비밀에 빨리 다가가게 되었다."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의 시작 부분이다. 이 책은 삶의 이면을 너무 빨리 깨달아 버린 12살 소녀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 쓰여 있다. 너무 세상을 빨리 알아 버렸기에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어진 '은희'는 이모의 애인 '허석'을 짝사랑하며 질투감을 느낀다. 겨우 12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말이다. 결국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는데, 서커스 구경을 갔다가 불이 난다. 그들 뒤로 훨훨 타오르는 불빛이 정확히 무엇을 상징하는 지 알 수 없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곤 했다.


소설 속 '은희'처럼 나 또한 삶의 고뇌를 너무 빨리 알아 버린 것 같다. 사춘기라 많은 고민에 휩싸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나만 놓고 보면 아마 그 일 때문에 정말 많이  힘들어하고, 그 힘듬의 시간을 거치면서 한 줄기 빚을 찾아 정신이 웃자라 버렸다. 사람마다 특정 나이대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사건, 그리고 수준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방황하며 5년 넘게 시간을 보내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정신적인 성숙이 이뤄져 버렸다. 이 성숙은 '올바른 가치관 형성' 또는 '깊은 사고' 와는 약간 성격이 달랐다. 단지 힘들었기에 빛을 찾아 내 생각이 가지를 뻗어 버린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대학교 4년 내내 '결혼을 전제로 사귈 여자'를 찾아 헤매다가 여자친구 한 번 사귀어 보지 못한 것도 웃자라 버린 생각의 결과일 것이다. 아마 나는 어딘지 모르게 안정적인 삶을 일찍부터 꿈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늘 미묘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에 비해서 좋았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대학 입시에 늘 시달려야 했음에도 고등학교가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5월마다 해당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련히 중학교에서 검사하고 왔을 것이고, 후천적으로 바뀌지도 않을 체질이니 고등학교에서는 별도로 검사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5월이 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친구들 앞에서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는 멍에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5월이 되면 따뜻해진 날씨 탓에 더욱 힘이 솟았고,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친구들과 더 재미있게 먹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나는 어딘가로부터 해방감에  행복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은 공통과정이고, 2학년부터는 인문계열(문과)과 자연계열(이과)로 반이  분리된다. 그래서 1학년 말이 되면 자신이 문과로 갈 것인지 이과로 갈 것인지 신청을 해야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골수 엔지니어 체질이었다. 매미가 쨍쨍 울어대는 한 여름에도 교실에 나와 선풍기를 뜯어 놓고 고민했다. 선풍기의 회전각이 조절되면 좋을 텐데, 늘 미련하게도 사람이 없는 곳까지 회전을 하는 선풍기가 야속했기 때문이다. 선풍기의 뒷커버를 벗기고  회전할 때 어떤 기계적인 원리가  작동되는지 살피고 연구했다. 그 뿐만 아니라 괴상한 진동 자동차를 만들어 와서 친구들 앞에서 시현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언제나 '괴짜 발명가'로 인정해 주었고, 장차 내가 공대 쪽으로 진학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나를 알고 있었다. 수학이 좋고 과학이 좋으니 '이과'로 진로 선택을 하여 '공대' 계열로 전공을 가지는 것이 맞았지만, 내가 가진 유전질환은 '이과' 계통 진학에 치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수학 2라는 어려운 수학책의 미분적분에  매료되어 있었다. 반드시 그 수학을 섭렵하려면 '이과'에 가야 했다. 그런데 이과에 가더라도 내가 가고 싶은 공대 계열의 진학이  불가능하다면 너무 허무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문과냐 이과냐 선택을 앞두고 하염 없는 갈등이 찾아 왔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이기에 그 누구에게 조언조차 구하는 것이 힘들었다. 너무 답답하여 복도의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 보았다. 약간의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도 나의 고민에 슬퍼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간단하게 '문과'에 동그라미 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만 반복하고 있는데, 내 주위에 조용히 한 명의 친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나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고민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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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상당히 공부를 잘 하는 친구였다.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는데, 훗날 들은 얘기로는 S대 법학과를 가서 사법고시를 통과했다는 이야기도 들려 왔다. 어찌 되었던 그는 나와 그렇게 친한 친구도 아니었지만, 얼떨결에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문과일까? 이과일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고, 때마침 고민을 물어 오는 친구에게 나의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 주었다. 친구의 답은 명쾌했다. 아무 문제가 없으니 '이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고민하는 그 문제는 '시각디자인과' 같은 고도의 색감을 요구하는 전공에서 따질법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5년 넘게 고민해 오는 일이라 그의 말을 바로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의 말이 옳았다. 나는 정말 지난 5년간 별 것도 아닌 일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이과로 진로를 결정했고,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전자공학과'만을 바라보며 공부를 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기에 등록금 전액 무료를 내세운 수원의 A대학을 목표로 세우고  공부했다. 휴일 반납은 기본이었다. 늘 학교 도서관에 나와서  공부했고, 그 당시 실력대로라면 그 대학을  가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고3 때 '폐결핵'이라는 중병에 걸려 버렸고, 한창 공부할 시기에 병원을 전전했다. 폐결핵이 나아 갈 때쯤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시야에 문제가 생겼고, 세상 모든 물체가 두 개로 보이고 잔상이 비췄다. 이런 모든 어려움을 딛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자 공부를 했다. 그런데 수능 당일에 신은 철저히 나를 외면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성적에 맞춰서 대전에 위치한 국립 대학에  입학했고, 장학금을 사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능하면 스스로 숙제를 하려고 했고, 홀로 던져진 대전 생활을 잘 꾸려 나가고 싶었다. 정말 정직하게 공부를 했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싶었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3학년 2학기 때 친구들의 집단 부정행위 사건을 보며 너무  힘들어했던 것 말이다.


대학교 시절.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비슷한 전공에서 엔지니어의 길을 찾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전자회로에 무한한 신비감이 느껴졌고, 처음으로 직접 만들어 본 '디지털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로폰 연주 로봇, 청소기 로봇, 붓글씨 로봇까지 기상 천외한 작품을 만들어 낼 때까지 나의 진로 선택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30대에 접어들 때, 내 몸에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공학 지식보다는 역사와 경제를 비롯한 인문학 지식에 더 흥미가 느껴졌다. 늘 집에 가면 그런 부류의 책을 보고, 강연을 찾아서 전국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그러기를 몇 년. 나는 완벽한 '문과생'으로 변모해 버렸다. 지금 당장의 생계는 '이과' 관련 직업이지만, 늘 내  마음속에는 '문과'를 꿈꾸고 있다. 가끔은 생각한다. 사춘기 시절에 나의 유전질환 때문에 그렇게  고민했던 많은 일들이 어떻게 보면 미래를 비춘 거울은 아니었을까? 요즘의 나는 어떤 루트로 '문과' 계통 직업군으로 옮겨 갈 것인지 고민 중이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건 지나고 나면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내 인생도 새옹지마에  부합될 만한 사건이 참으로 많다. 수능을 망쳐서 가고 싶은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그 대학은 D 그룹 부도로 인해 명성을  잃어버렸다. 또한 인생을 '이과'로 정하려고 안간힘을 써 왔지만, 결국 나는 '문과'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까지도 돌아 놓고 보면 모두  그때 당시의 의미가 느껴진다. 같은 원리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많은 사건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를 택한 것도 훗날의 특정한 사건을 준비하는 내 운명의 스펙트럼은 아닐지... 물론 20년은 지나야 알 것 같은 일이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작아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사춘기 시절에 고민했던 '진로선택'의 문제, 30대에 고민했던 '직장'의 문제도 훗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 그 순간에 이유가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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