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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선생 Jan 31. 2020

누군가의 역사

영화 "미래의 미라이" : 이해의 시작은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한 인정이다

 주말에 아들과 앉아서 IPTV를 뒤적거렸다. 혼자 있으면 많은 영화들 속에서 무엇을 볼지 행복한 고민을 하겠지만, 아들이 깨어있는 시간에는 제약조건이 많다. 전체 관람가의 범위에서 저속하거나 간단한 욕도 나오지 않는 영화를 찾아야 한다. 결국, 애니메이션 섹션에서 리모컨이 바삐 움직이게 된다. 요즘 아이들스럽게 마블과 디즈니를 좋아하는 친구이다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설득하여 보게 된 영화는 '미래의 미라이'이다. 일본어로 하면 '미라이노 미라이', 미래에서 온 미래(미라이)이다. 처음에 아들 혼자 보게 하고 거실에서 책이나 읽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청하고 나는 그에 대한 글까지 쓰고 있다(선택을 양보해준 아들에게 감사한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는 쿤이라는 아이가 동생(미라이)이 태어나면서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판타지이다. 쿤은 미래에서 온 자신의 동생(미라이)과 함께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을 시작으로 할아버지, 어린 시절의 엄마, 어린 시절의 아빠, 할머니 등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들의 일상이 차곡차곡 쌓이고 이것이 누군가의 삶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깨닫게 된다. 마치 우리가 아이를 낳고서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고, 직장상사에게 욕을 먹고 버티면서 아버지의 비애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우리들만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역사는 우리의 일상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행동의 근거이다. 나이만큼 누적된 일상이 현재 행동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생각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 내지 핑계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타인의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거나 누군가의 His-story를 모른 상태에서 그를 판단하거나 규정짓는 행위는 굉장히 위험하다.

 직업이 선생이다 보니 학기 초마다 학생들에 대한 판단 근거를 찾기 바쁘다. 3월~4월 동안에는 학생들의 성향과 성격, 환경과 살아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몇 년 전, A학생의 2학년 담임선생이 되면서 타인의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A학생에 대한 학교 내 평판은 게으르고 지각이 많은 아이, 수업시간에는 내내 엎드려서 자는 아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 못하는 아이, 자해에 중독된 아이였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A학생에 대해서 좋지 못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졸업하기 전에 그만둘 것이라는 이야기만 무성했다. 3월이 시작되면서 A학생과 제일 먼저 상담을 시작하였고, 나에게는 고맙게도 자신의 지난 과거를 하나씩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외국 생활과 어려운 가정환경, 사업실패로 인한 부모의 자살시도와 목격한 A학생, 빚쟁이들의 끊임없는 방문과 가족의 도망 등의 이야기는 굴곡이 너무 많았다. 영화로 만든다 해도 어둡고 차가운 색톤을 지닌 누 아르풍의 가족 스토리일 것이다. A학생이 보여주는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오히려 삶을 근근이 버티며 학교를 나오는 A학생이 고마웠다. 나라면 제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A학생은 아픈 상태였다. 극심한 우울증과 자해 중독, 폭식증과 거식증, 애정결핍 등 많은 정신적인 이상 징후가 보였다. 병원을 다니며 정기적으로 약물치료를 받고 있었고, 전문 상담사와 매주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A는 나름대로 자신의 현재와 열심히 싸워가고 있는 것이었다. A의 과거 궤적을 알게 되면서 현재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약물치료를 받다 보니 약물이 강해질 때면 수업시간에 내내 일어나지 못했고, 약물의 강도를 줄이면 우울증이 심해져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다. 약을 먹고 자면 약에 취해서 가끔은 일어나지 못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신을 학대하며 풀었던 것이다. 한 번은 A를 이해하다 못해 감정이입이 되어 붕대를 감은 팔을 잡고 펑펑 같이 울었던 적도 있었다.  A학생의 경우에서처럼 현재의 행동과 과거의 역사를 파악하며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태극기 집회를 하는 어르신들이 미국 성조기를 들고서 집회하는 행동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많은 어르신들은 연세가 60대 이상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194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태어났고,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겪은 전후에 유년시절을 보낸 분들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GDP는 67달러(1953년)로 전 세계 109위의 최극빈국가였다. 주 산업은 농업이었으나, 전 국토가 전쟁으로 황폐화되었고, 산업시설은 전무했다. 목숨을 유지하게 해주는 유일한 젖줄은 전 세계에서 오는 식량지원이었고, 그중에서도 민주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입증하려는 미국의 막대한 지원이 가장 컸다. 이러한 해외원조를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 10%~15%의 경제성장을 계속해왔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경제는 산업화를 일구었고, 1940년대~1960년대 출생자가 한창 일하며 전성기를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이들의 전성기와 우리나라 경제의 급성장기가 맞물리며 산업화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미국은 구세주이고, 이들의 전성기는 구세주의 은혜에 힘입은 것이라는 판단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성조기의 출현은 그들의 전성기에 대한 노스탤지어 정도일 것이다.

 절대로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모두 다 포용하며, 사랑하고 이해하자.. 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많은 행동에는 옳고 그름이 존재하고, 그 행동들이 다 받아들여질 수 없다. 다만,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참고자료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 참고자료는 그 사람의 역사에 있고, 그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래야 개인적인 실수나 오해를 줄이고, 타인에 대한 올바른 대처가 가능해질 수 있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에서 쿤은 타인(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상으로 이루어진 역사를 보고, 자신과 주변 상황에 대한 시선이 바뀌게 되었다. 더 이상 동생이 밉지 않았고, 자신을 다그치는 엄마의 행동이 이상하지 않았고, 타기 힘든 자전거를 타도록 응원하는 아빠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자세, 즉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숙, 성장이 이러한 것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 눈을 돌려 그들의 역사를 인정하기 시작할 필요가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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