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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선생 Mar 30. 2020

인간 삶에 대한 고찰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미국의 남부 사투리와 배경음악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배경음악은 그저 사람들의 대화와 주변 소리뿐, 인위적인 소리나 음악은 거의 삽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만들어내기에  너무도 충분한 탄탄한 스토리, 인간의 본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곳곳에 숨겨놓은 메타포들은 최고의 영화로 인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영화는 인간의 본성을 비유하는 캐릭터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영화를 보는 내내 고민하고,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1) 캐릭터 분석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단연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이다. 무자비한 킬러에 싸이코 패스와 같은 살인행각을 벌이는 인물이다.  동전 던지기를 통해서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킬러로 단순한 미치광이로 치부하기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킬러이다. 영화 포스터에서 보듯이 안톤 쉬거의 눈이 포스터 전면을 뒤덮고, 우리를 향하고 있다. 필자는 안톤 쉬거를 인간의 삶 속에 '우연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았다. 

다음은 안톤 쉬거를 피해서 돈가방을 가지고 도망 다니는 인물인 를르윈 모스(조쉬 브롤린)이다.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레인저나 사냥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사냥 중에 우연히 돈가방을 얻게 되고, 그 후 안톤 쉬거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 다니게 된다. 그는 돈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자만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돈은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며, 자신은 이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칼슨 웰스(우디 해럴슨)라는 인물은 해결사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안톤 쉬거와 같이 킬러인데 그 모습은 전혀 다르다. 안톤 쉬거는 촌스러움을 풍기는 의상과 머리 스타일을 하고 다닌다면, 칼슨 웰스는 말끔한 정장에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닌다. 걸음걸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허영심이 묻어 나오는 캐릭터이다. 특히나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에게 주차권 도장을 찍어달라는 모습이나 고용주의 빌딩에 한층이 없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은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만들려는 '허영'이 엿보인다. 칼슨 웰스는 인간의 본성 중 '허영'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주요 인물은 에드 톰 벨(타미 리 존스)이다. 에드 톰 벨은 삼대에 걸쳐서 보안관을 하는 집의 보안관이다. 그는 안톤 쉬거와 를르윈 모스의 흔적을 뒤쫓고, 를르윈 모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긴 삶을 통해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우연성으로 부터 아무것도 막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그가 결국 깨달은 것은 미래를 향해서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서 어떠한 것도 하지 못한다는 삶의 허무이다. 



2) 우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그 허무한 결말

감독은 보안관이 안톤 쉬거를 잡은 뒤에 살해당하는 부분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안톤 쉬거에 의해서 보안관이 목 졸려 죽으면서 발버둥 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보안관이 죽는 장면은 40초가량 지속되는데, 이는 우연성을 피하려는 인간의 발버둥 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인간은 우연히 직면하게 된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지만, 결국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인간을 더욱 옭아매는 힘이 강해지도록 할 뿐이다. 영화 장면에서도 보안관의 강한 몸부림은 안톤 쉬거의 목조름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으로 향하게 될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연성에 직면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그에 관한 몇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주유소 주인과 안톤 쉬거의 만남이다. 

주유소에 들른 안톤 쉬거에게 주유소 주인은 '어디서 왔냐?'라고 아무 의미 없이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질문은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게 하였다. 안톤 쉬거는 그를 죽이기 전에 동전 던지기를 하였고, 동전이 앞면인지 뒷면인지 맞추도록 하였다. 결국 동전이 앞면임을 맞추게 된 주유소 주인은 살아남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 안톤쉬거에 의한 우연한 죽음을 벗어나게 해준 것은 살려고 하는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또 다른 우연함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인간이 죽음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은 노력보다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를르윈 모스의 부인을 죽음을 결정하는 장면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를르윈 모스의 부인을 찾아와 그녀의 죽음을 놓고 동전 던지기를 하는 안톤 쉬거의 모습이다. 그는 이미 를르윈 모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인을 찾아온다. 를르윈 모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부인을 죽여야겠다는 결정에서이다. 안톤 쉬거는 를르윈 모스의 부인을 앞에 두고 또다시 동전 던지기를 한다. 그 결과 를르윈 모스의 부인은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문에서 나오는 안톤 쉬거가 발바닥을 체크하는 장면으로 유추해볼 때-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는 우연이라는 것은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이 찾아오고, 우연적인 선택에 의해서도 피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연은 말 그대로 아무런 상관없이 찾아오고, 또 갑자기 지나가기도 한다. 말 그대로 우연인 것이다. 이러한 우연 속에 인간의 삶은 단지 동전 던지기의 결과를 추측하는 것만큼이나 무기력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렇게 예측하지도 못하고,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우연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감독은 그 대답을 영화의 끝부분에 제시한 듯싶다.

를르윈 모스의 부인을 살해하고 차를 타고 유유히 가던 안톤 쉬거는 교차로에 갑자기 나타난 차에 의해서 사고를 당한다. 사고를 당한 그는 천천히 차에서 걸어 나와 길가에 앉는데, 그의 팔은 부러져 뼈가 튀어나왔고, 제대로 걷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안톤 쉬거는 어떠한 불평도 어떠한 고통도 호소하지 않고, 자신을 도우러 온 소년들에게서 셔츠를 사고, 그 셔츠로 팔을 고정시킨 뒤 천천히 걸어서 사라진다. 이때 안톤 쉬거는 소년들에게 돈을 주며 당부한다. 


"you didn't see me, I am already gone" 


이 장면은 갑작스러운 우연을 인간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버둥을 쳐도, 어떠한 선택을 하여도 벗어나지 못하는 지독스러운 우연을 그저 담담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삶의 길을 계속 가라는 것이다. 우연에 의한 불평과 고통은 모든 인간이 느끼는 것이지만, 결국 인간이 그러한 우연을 삶 속에서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이 삶이라고 받아들이고 계속 살아가라는 것이다. 무기력해질 필요도, 허무하게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연이 바로 삶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3) 우연적 불행이 노리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자만심

이 장면은 길가던 차를 세우고 안톤 쉬거가 그 운전자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살해하기 직전에 안톤 쉬거가 그 운전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Would you hold still?" 그런데 바로 뒤에 를르윈 모스가 같은 대사를 날린다. 그때 를르윈 모스는 자신의 사냥감을 노리면서 이야기한다. "you hold still"... 이 대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우연한 불행의 화신인 안톤 쉬거가 인간을 노리고 가만히 있으라 하고, 욕망과 자만심을 대표하는 를르윈 모스는 자신의 사냥감을 보고 가만히 있으라 한다. 이 장면을 연결해서 보면, 인간의 욕망과 자만심은 돈이나 포획물을 향해서 있지만, 그 순간 우연한 불행은 그 인간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독은 인간의 욕망과 자만심이 인간에게 우연한 불행과 예상되는 불행이 모두 찾아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냥을 하는 를르윈 모스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늑대와 다르지 않았다. 즉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를르윈 모스는 물을 달라는 총상자를 버리고 돈을 좇아서 결국 돈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총상자를 버린 죄책감(?)에 다시 물을 들고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죄책감에 돌아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에 죄책감이 있었다면 돈을 챙긴 뒤에 물을 가져다줘야 한다. 하지만 총상자가 이미 죽어있었을 시간에 그를 찾아가고 결국 그 과정에서 예상되는 불행(돈 주인들의 공격)을 만나게 된다. 이는 죄책감에 의해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자만심에 의해서 생겨난 불행이다. 돈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한 후에 자신은 불행을 피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그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우연한 불행까지 그의 뒤를 쫓게 된 것이다. 결국,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신의 욕망과 자만심이었던 것이다. 




4) 죽음 앞에서도 가지게 되는 인간의 허영

해결사인 칼슨 웰스가 안톤 쉬거와 대면하게 되는 장면이다. 우연한 죽음에 직면하게 된 칼슨 웰스는 안톤 쉬거와 거래를 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설득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칼슨 웰스는 허영심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자신의 돈을 주고서 안톤 쉬거와 거래를 하려 하지만, 그것이 잘 통하지 않자 돈가방의 위치를 말하고서 자신을 살려달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영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끝까지 안톤 쉬거와 거래를 하려고 노력한다. 허영을 통해서 인간의 눈이 어둡게 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허영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허영에 빠진 인간은 자신의 불행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일이 어떠한 것인지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허영심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5) 노인의 꿈을 통한 인간의 삶

이 장면은 애드 톰 벨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두 가지 꿈을 꾸었는데, 하나는 아버지가 돈을 주었는데 잃어버린 꿈이고, 다른 하나는 춥고 눈이 쌓인 산을 애드 톰 벨이 말을 타고 가는데 아버지가 자신을 지나쳐서 계속 과거를 지나쳐서 앞으로 달려가는데 담요로 둘러싸고 고개를 숙인 채로 옛날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뿔 속의 불로 달 같은 색깔의 불빛을 만들었고 어둡고 추운 저쪽에 불을 지피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꿈은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화면을 봐도 애드 톰 벨이 관객을 향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구성을 하고 있다. 즉 인생을 살아간 한 노인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

두 번째 꿈은 지나간 세대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애드 톰 벨은 현재의 우리를 뜻하고, 그의 아버지는 지나간 세대를 뜻한다. 그리고 춥고 눈이 쌓인 산은 현재의 세태를 이야기하고, 뿔은 유럽의 신화에서 풍요와 지혜를 뜻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 꿈을 해석하자면, 앞선 세대들은 미래를 밝히기 위해서 지혜와 풍요의 불을 지피고 있으며, 현재 세대인 우리는 그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꿈은 안톤 쉬거가 가져오는 우연적 불행을 막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함과 허무에서 발생된 것이다. 즉 인간 아무리 노력해도 우연적 불행을 막지 못하고, 무기력함과 허무를 느끼지만, 우리보다 먼저 지나간 세대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삶의 방법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의미를 나름대로 마지막 장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꿈 이야기를 하는 애드 톰 벨은 마치 소년이 잘못한 것을 고백하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이 들어 은퇴한 보안관이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 그는 노인이 아닌 소년이었다. 즉,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노인이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대답은 노인이나 소년이나 모두 다 알지 못하고, 모두에게 모순적이며 우연적인 삶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길이가 길던 짧든 간에 어느 누구도 인생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인생이고, 이러한 인생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쓸데없는 욕망과 자만심, 그리고 허영과 힘없는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돈이나 욕망을 추구하지 말고, 앞서 살아간 세대를 교훈 삼아 인생에서 지혜와 풍요를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아마도 현대인이 추구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라고 유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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