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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선생 Feb 03. 2020

우리는 어디쯤 표류 중일까?

영화  "김씨 표류기" : 고립을 강요하는 사회

 영화 "김 씨 표류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포스터 디자인이 귀여워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영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내용은 우리 사회 속에서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면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히키코모리'는 일본어로서 은둔형 외톨이를 뜻한다. 단순히 숨어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일정 장소에 틀어박혀서 사회와 자신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들은 사람들과의 실질적인 만남을 통한 교류는 극도로 피하고, 인터넷과 익명성이 보장되는 매체를 통해서만 사회와 소통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 심적 요인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사회 부적응이나 경제적, 사회적 성취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 등과 같은 것으로 인해서 발생된다고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은 바로 히키코모리이다. 둘 다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가두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하고, 같이 느끼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이 진입하기에 녹록한 상대는 아니었다. 남자 김 씨는-등장인물 모두 그저 김 씨에 이름도 없다-대출한 돈을 갚을 능력이 없어 한강으로 투신자살을 한다. 하지만 뜻대로 자살은 이뤄지지 않고, 한강 한가운데 있는 밤섬에 표류하게 된다. 궁지에 몰려 자살을 시도한 남자 김 씨지만,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밤섬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섬을 탈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단지 물에 대한 공포만은 아니었다. 남들은 다하는데 왜 너는 못하냐며 다그치는 가족, 능력이 없다는 식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회사 면접관들, 무능력이 죄라며 떠나간 애인, 돈 빌려가라며 즐겁게 광고를 해서 자신이 2억 넘게 빌리게 한 사채업자들. 이들은 모두 남자 김 씨를 섬으로 밀어 넣는 것들이다. 이러한 압박감에 다시 자살을 택하던 남자 김 씨는 살고자 하는 본능과 어릴 적 빨아먹던 '사루비아' 꽃을 통해서 자신이 가졌던 지난 과거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자살보다는 그 섬에서 홀로 살아가기를 택하게 된다. 자신은 섬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섬을 벗어나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돈에 대한 압박과 성공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 남들보다 조금은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만의 은둔 생활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 김 씨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히키코모리이다. 방안에서만 3년째 살아가고 있고, 가족과의 대화나 사람들과의 만남은 철저히 배제한 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살아가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하지만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만 활동을 하는 식의 무기력에 휩싸인 은둔형 외톨이들과는 차이가 있다.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인터넷 미니홈피-현재는 SNS가 같은 도구일 것이다.- 만을 통해서 만들어가고 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그리고 미니홈피를 통한 자아실현을 만들어가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이마에 큰 흉터가 있어서 왕따를 당했던 기억으로 사회에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지만, 실상 그녀는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싶고, 누군가와 편견 없는 소통을 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그 속에서 자신을 개발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바라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미니홈피를 통해서 익명성을 바탕으로 계속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생활하던 여자 김 씨는 어느 민방위 훈련 시간에 남자 김 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와의 소통을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이 둘은 우리 주위에 있는 여느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는 이들 - 그래서 성조차도 제일 많은 김 씨로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고, 누군가보다 조금 덜 이쁘며, 사회에서 인정받을 정도의 능력이 없는 것뿐이지만, 여느 우리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이들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사회의 잣대로 평가를 하려고 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면, 이러한 평가를 아무렇지 않게 겪게 된다. 이름을 밝히고 나면, 다른 질문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직장은 어디인지, 연봉을 얼마나 받는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등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또한, 내 겉모습 또한 이러한 평가를 바로 받게 된다. 키는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어떠한 옷을 입고 있는지,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는 무엇인지, 자가용은 있는지, 있으면 어떤 차인지 등. 이렇게 자신을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표면적인 것들은 바로 내가 되어버리고, 자기 자신이 가진 생각이나 신념과 같은 것들은 그저 참고 자료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평가에서 부족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없는 이들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고, 이들은 자기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회적 은둔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영화에 등장한 캐릭터들처럼 극단적인 은둔을 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일정 부분의 사회적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서로서로를 히키코모리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회 속에서 강자들은 '지들이 좋아서 그런 걸 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선택의 길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히키코모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일정 부분 히키코모리가 되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진솔한 소통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모습으로 타인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그 자체와 너라는 사람 그 자체로 대화를 하고 교류를 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남자 김 씨와 여자 김 씨가 사회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서로에 대한 관심과 서로에 대한 기대를 했던 것은 자기 자신,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였다. 다른 누군가와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아닐까? 

 과거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사회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획일적이고 몰 인간적인 평가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곤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우리들도 다른 누군가에게서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도 모른 채,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평가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순간적으로 불쾌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영화의 두 주인공처럼 히키코모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타인을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서 느끼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히키코모리는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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