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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선생 Mar 11. 2020

프롤로그

교사, 더 비기닝

"전 선생질 안할 건데요."


 나는 고등학교 교사이신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나에게 아버지는 혹시 모르니 교직이수를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던진 말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한숨을 푹 쉬시고는 말씀하셨다.


"너네 아버지도 선생님이야. 선생질이 뭐냐, 선생질이..."


그때만 해도 나에게 교사라는 직업은 안중에 없었다. 직업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들에 대한 경험이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1학년 입학해서 키가 큰 K선생님 반이었다. 아직도 반이 기억난다. 1학년 4반. 담임 선생님이었던 K선생님은 맨 앞에 앉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며 장난을 치셨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장난이 아니었다. 나의 허벅지를 꼬집어 시퍼렇게 멍이 들게 만들고, 교실 앞에서 바지를 잡아 올려서 속옷과 은밀한 부위까지 드러나도록 하고, 나의 가톨릭 본명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웃으며 '바퀴벌레'라고 불렀고, 한동안 내 별명은 '바퀴벌레'였다.


어느 날, 동네에서 놀던 나를 만나 K선생님은 우리 집 근처까지 와서 집을 보고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했다. "조만간 선생님께서 가정방문하신데요."라고. 진짜로 가정방문을 했다. 내 기억에 더운 날이어서 어머니께서 수박과 삼계탕을 준비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K선생님은 같이 앉아 있었고, 그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어머니께서 나가서 놀다 오라고 하셨다. 한참이 지나서 집에 들어오니 어머니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학교에서 무슨 잘못을 했나 싶었다. 어머니께서는 학교에서 행동 잘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께서 직접 큰 화분을 들고 학교에 찾아와서 K선생님을 만나고 가셨다. 그 이후에 K선생님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대학을 진학하고서 K선생님을 우연히 멀리 버스정류장에서 보았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입에서는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그 새끼는 선생도 아니야. 개새끼지. 너 초등학교 입학해서 그 새끼가 괴롭히고, 집에 찾아왔던 거 기억나? 그거 다 촌지 내놓으라고 온 거야. 같은 처지에 다 아는데 나눠먹자나 뭐래나. 그건 선생도 아닌 새끼야."


3명의 아들을 키운 어머니 입에서 나온 단어로는 크게 특이하지는 않았지만, 많이 분해하셨다.


"너희 아버지는 그런 거 몰라서 맨날 돈에 쪼들려서 살았는데, 선생이라는 놈이 와서는 노골적으로 돈 달라고 하고, 내가 그날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어떻게 하질 못했어. 그다음에 니네 아빠가 찾아가서 교장한테 신고한다고 한 다음에 잠잠해졌잖아. 말도 하지 마. 짜증 나니까."


아버지는 화분을 선물하러 가신 게 아니었다. 내 새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러 오셨던 것이다. 나는 다음에 만나면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K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제 허벅지 꼬집어서 멍들게 하고, 우리 집에 와서 촌지 내놓으라고 했다면서요.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지. 요즘 생활을 괜찮으세요? 얼마 좀 드릴까요?"


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야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 후로는 볼 수 없었다. 아쉬웠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자면 K선생님은 나에게 신체적 폭력, 정신적 폭력, 금품 요구, 언어폭력을 일삼았고, 아동학대 고발 의무자의 입장에서 아동학대를 자행한 인물이었다. 이 인물이 1, 2학년 동안 나의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후로 3, 4학년 동안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선생님에 기억이 좋아질 무렵에 5, 6학년 동안 엄청난 차별 대우를 하던 나이 드신 할아버지 선생님 덕분에 초등학교 교사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진학한 남자 중학교의 모습은 자못 정글스러웠다. 약육강식이 기본 원리인 교실이었고, 그 정점의 강자는 교사들이었다. 체벌이 일상화되어 있다 보니 무자비한 모습들이 교실에서 수시로 일어났다. 뒤돌려 차기로 학생을 교실 밖으로 날려버린다던가, 바닥에 머리 박고(일명 대가리 박아) 엉덩이 때리며 전진시키기, 구레나룻을 잡아채며 교실 한 바퀴 드리블하기, 손깍지 끼고 칠판에 발 올리고 엎드려뻗치기, 대걸레 자루를 부러뜨려 온몸을 폭행하는 모습 등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공간이었다.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폭력의 수위는 조금 낮아졌지만, 체벌은 여전했고, 학생들에게 쌍욕을 하는 모습,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진학만이 살길이라며 주입식 교육을 하는 모습들을 많이 접했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박힌 교사의 이미지는 그러했다. 1996년에 발매되었던 패닉의 '벌레'라는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우릴 잘 다루는 / 솜씨가 마치 / 세게 때려놓고 / 살짝 쪼개는 당신은 미친 걸레 / 마치 지는 깨끗한 척/  거짓투성이 눈빛  / 끝내 뭣 같은 너의 생각 / 엿이나 처먹으라지 / 일단 때리기만 하는 / 또 잘못을 모르는 / 당신은 더럽고 둔한 짐승 / 더 때릴 이유도 없는데 / 지맘껏 때리고선 슬픈 표정으론 / (나도 마음이 아파)  / 이런 뻐뻔히보이는 거짓말 한대  확 쳐버리고싶지 / 저런 냄새나는 것들을 / 우린 존경하는 님이라부르고 / 무릎 꿇어야 하지 (이하 생략)


가사의 대상은 선생님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가사를 읽고 많은 상처를 받았겠지만, 사춘기 소년이었던 나에게 교사의 모습은 딱 이런 모습이었다. 내성적인 모범생이었던 나는 패닉의 '벌레'를 학교 방송국에 신청을 했다. 마치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엄청난 용기로 신청했다. 방송시설이 좋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이 나가고 나서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서만 심각했던 해프닝이 되고 말았다. 다만, 그 노래를 알고 계시던 선생님께 혼이 좀 많이 났었다. 너에게 실망이라는 말과 함께.




초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지내던 나에게 정말 멋진 교사가 찾아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온 키팅 선생님이었다.

1996년 가을쯤이었다. 입시에 치이며 자율학습을 마치고 오던 토요일 오후, 평소에 지나다니던 길에 비디오 대여점이 망해서 비디오테이프를 1개에 1000원씩 떨이로 팔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던 나는 슬쩍 들어가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2개의 테이프로 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발견했다. 시놉시스는 학생들과 선생님, 학교에 대한 이야기라고 쓰여 있었는데 19금-지금은 12세 이상이지만, 당시 내가 산 비디오테이프 표지에는 분명 빨간색으로 19금 동그라미가 적혀있었다.-이었다. '이건 뭐지?' 싶었다. 더군다나 빨간 옷을 입은 남학생들이 남자 선생님을 헹가레 하는 듯한 케이스 표지는 19금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사겠다는 마음을 먹고는 계산을 하면서 혹시 안 팔면 어쩌나 하며 마음을 졸였다. 가게 테이블에 테이프를 놓으니 아저씨가 나를 힐끔 보고는 


"좋은 영화야."


라며 한마디 하셨다. '19금인데? 좋은 영화라고?' 나는 허겁지겁 비디오 대여점을 나와서 집으로 갔다.


당시 EBS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EBS 강의를 녹화해서 본다는 핑계로 방에 비디오 플레이어를 내 방에 놨었다. 그래서 종종 주말에 밤늦게까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비디오테이프를 몰래 사들고 와서는 부모님께서 주무시길 기다리다가 늦은 밤부터 보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학생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사랑, 삶의 가치, 그리고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어린 나에게 어렴풋이나마 알게 해 준 영화였다. 너무나도 클리셰 같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키팅 선생님(로빈 윌리암스)에게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며 토드(에단 호크)가 책상 위로 올라갈 때, 온몸에 소름이 끼쳤고,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소름 끼치는 감동이 밀려온다. 군사독재가 끝난 지 1~2년 만에 수입한 영화라 기존의 체제에 반항하는 행동이나 조롱하는 행동-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누드사진을 보는 장면, 교장선생님의 지시를 어기는 장면, 전체 학생 앞에서 교사를 조롱하는 장면 등-이 나오기 때문에 19금이 아니었나 판단이 된다.


이러한 장면들보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누가 봐도 진정한 교사로 보이는 키팅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학생들에게 삶의 의미와 정수를 가르치고, 모두가 자유롭고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모습. 입시만을 강조하고, 명문대 진학만을 강조하는 현실의 선생님들과는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더욱 싫어졌다. 그 후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가슴에 남는 영화가 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나라에는 저 모습의 선생님은 없다고 단정 지어 버린 영화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대학 진학과 졸업, 입사와 퇴사, 대학원을 거쳐 현재 11년 차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선생질' 안 하겠다던 나는 결국 선생님이 되어서 '선생질'을 하고 있다. 그것도 모든 학생들이 싫어하는 생활지도부 교사생활만 8년 차이다.  지금도 아버지께 '전 선생질 안 할 건데요.'라고 말하던 때를 떠올리면, 이불 킥을 수십 번 할 정도로 부끄럽다. 2010년 처음 기간제 교사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오만하게도 내가 완벽하게 준비된 교사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도 부족함을 깨달았고, 부끄러웠다. 교사로서 생활을 하면서 키팅 선생님의 모습을 하고 싶지만, 현실과 타협하게 되는 순간을 계속 겪으며 많은 갈등을 해왔다. 3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아직도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시던 한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린다. 교사는 교편을 놓을 때까지 학생과 같이 성장한다고 말한다. 교직 생활 10년이 지나서야 내가 얼마나 교사로서 성장했는지, 아이들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나는 올바른 어른의 모습으로 가다듬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조금씩 글로 남기려고 한다. 그 내용에는 여러 가지 논란도, 논쟁도 있겠지만, 철저하게 나의 개인적인 시선에서 기록하고 남긴다는 점을 미리 이야기하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여러 사람들이 선생님들의 성장과정과 아이들과의 생활, 선생님들의 말 못 하는 고충 등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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