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혜 Apr 09. 2017

별안간어머님

D+125, 물음표

마치 학생 때 체력장을 하고 난 다음날의 상태와 같은 몸을 이끌고 문닫기 직전 집 근처 서점에 들러서 요즘 계속 내 맘에 들어와있던 책을 얼른 구입했다. <82년생 김지영>


출산 후 처음으로 들어가 앉은 스타벅스에서 두세장을 읽자마자 눈물콧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저 건조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간 소설..보다는 다큐멘터리 책일뿐이었다. 젠장, 하필 자리가 정 가운데밖에 없어서 소매로 눈물콧물을 몰래 훔치다 구석으로 슬며서 자리를 옮겨 계속 읽었다.

중간에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영업이 끝났으니 나가라는 스타벅스 매장 내 멘트를 듣고 얼른 집으로 부리나케 왔다. 잠든 춘이를 확인하고는 방에 들어가 나머지를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다. 결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내가 눈을 감고 외면하려했던 것들이 현재 나에게 얼마나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는지, 왜 출산 후 어떤 부분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문이 생기는지 대해, 그 실체를 매우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출산 직후 한달간은 어떤 의문도 들지 않았었다. 나의 업무와 너의 업무가 효율적으로 분배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주말에도 내가 커버해야 하는 영역들이 늘어났다. 참 맘에 안드는 단어지만 이것이 바로 독박육아라는 것인가? 뭔가 기분이 이상했지만, 몸이 일단 더 힘들었기에 거기에 쏟을 에너지가 없었고, 또 현재 돈을 버는 사람은 남편이고 난 돈을 벌지 않고 있으니 이 구조가 맞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다 요 근래에 남편으로부터 왜 주말에 한번 몇시간 나갔다오게 해주는데 감사함을 모르냐는 얘길 들었는데, 순간 머리를 국자로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래 이 가정을 유지하는데 돈이 제일 중요하고, 현재 돈을 버는 건 당신이니까 또 다시 그렇게 생각했다. 기분은 뭔가 찜찜했지만, 그냥 내 생활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서 명확히 떠오른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작년 3월에 임신을 확인하고 4월 5월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한 곳에 그 프로젝트를 하지 못하겠다고 죄송하다고 얘기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그즈음, 나는 그 전에 했던 일과는 아예 다른 명상과 테라피쪽의 일을 시작하려고 알아보고 있었고 두 곳에서 오퍼가 왔었으며(물론 다 거절했지만) 관련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기존 경력도 이어가고 돈도 벌어야된다는 생각에 그 프로젝트 일을 수락했던 것이었다. 난 임신과 출산으로 사회생활이 단절된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경단녀가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또 다른 하나, 결혼을 하고 임신 전 직장을 옮기면서 중간에 쉼이 두차례 있었지만, 그 기간에도 실업급여 혹은 프리랜서 일, 결혼전 모아놨던 적금을 깨며 꾸준히 우리의 생활비에 '나'의 돈들을 부었었다. 임신 확인 후 그 프로젝트를 거절하고서도 난 무거워진 배로 허리를 두들겨가며, 사무실 구석진 바닥 요가매트에서 눈치 쪽잠을 자며 거의 막달 두달정도 사무실 알바를 해 생계에 보태기도 했다. 실제로 내가 온전히 남편 돈으로 내 생활을 한 기간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랬음에도 내 스스로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띄엄띄엄 노는 사람이라고 나를 일정 부분 규정지었던 것이다. 단 하루도 마음 편히 놀아보지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임신 후 기존의 사회생활이 끊겼고, 출산 후 난 24시간의 대부분을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거나 긴장상태로 새로운 업무대기 중이다. 업무를 하고 있음에도 시간을 쪼개 내 일을 계획하고 미래를 위해 배우고 있는데, 왜 내가 일주일에 하루 몇시간을 그것도 몇번 안됨에도 나를 위해, 정확히 말하면 내 미래를 위해 썼다는 이유만으로 감사함을 강요받아야 하는 것인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았으면 나 스스로 얼마든지 내가 돈을 벌어 내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데, 만약 당신이 애기 몇시간 봐줬던 것에 내가 감사함을 만족스러울때까지 생활 전반에 있어 계속 표현해야한다면, 당신이 일하며 경력 쌓을 동안 내 사회생활은 전혀 없는채 집안일과 육아를 떠맡고 있는 나에게도 '굳이' 감사해야하는 것이 아닌지 물음표가 점점 커졌다.

 서로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에 격려하며 고마워하는 건 매우 좋은 일이고 명상의 큰 축이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존의 내가 완전히 없어진 상황에서 나 역시도 극한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누구의 위로없이 심리적으로도 혼자 헤쳐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나만 감사함을 강요당하는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 뿌옇게 자리잡고 있던 어떤 덩어리의 실체가 이 책으로 확인되었다. 내가 왜 임신기간부터 현재까지 문득문득 춘이가 아들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다행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춘이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야한다. 또 한 사람의 인생을 벌어오는 돈의 액수로만으로 판단하지도 않게 가르쳐야한다. 할 일이 많다.


지금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더 못쓰겠다.

난 주말인 내일도 똑같이 일어나 주중과 똑같이 일을 해야한다. 오늘 몇시간 잠시 일을 쉬었더니 내일 춘이가 먹을 분유 젖꼭지가 안남아있어서 이 새벽에 다시 업무모드를 가동해야한다.


남편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나 역시도 바깥에서 일만 했을때는 알지 못했던 세계였으니. 다만 현재 돈을 벌지 않는 나도,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나도 갑자기 바뀌어버린 내 역할을 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답은 어찌 보면 심플하다. 서로 대화를 충분히 하며'서로'의 희생에 대해 고마움을 많이 표현하며 때로 의견이 다를지라도 조곤조곤 합의점을 찾아가면 의외로 쉽게 풀릴 부분이다. 하지만 그 프로세스가 작동이 안되면 정말 영원히 풀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 한국 사회 구조 안에서는..


<82년생 김지영>, 김지영이 자라온 가정환경과 남편의 캐릭터만 제외하고는 정확히 내 이야기였다.


















작가의 이전글 별안간 어머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