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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eL Dec 29. 2021

자유를 생각하는 9들에게.

19살에 기다리던 자유는 여전히 잘 계신가요?

하염없이 무너지는 어제라는 젊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저 시간이 흐르고 년도가 바뀌는 것 뿐인데 우리는 곧 한 살을 더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많은 의미가 뒤따라 온다. 몸은 그대로인데 나이만 먹는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다. 몸도 어제와는 다르고, 생각도 고루하고, 일상도 지겨워진다. 그래서 이 맘 때의 시간은 모두에게 중요하다. 특히 뒷자리가 9인 사람들에게는 정말 보내기 싫은 시간이겠지.


몇 년 전,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시공간이 깨지는 신정까지의 5일 간 많은 생각을 했다. 앞 자리가 바뀌면 '이제 예전처럼 살면 안되겠지?', '이제 자유롭게 사는 건 끝났구나.', '결혼도 하고, 직장에 완전히 자리도 잡아야 하네.' 등의 한탄을 하며 마치 어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듯 결연한 태도를 가지고 일상을 보냈다.

그 중 내 머리 속에서 절대적으로 빼 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워킹 홀리데이" 그리고 해외 이민 계획.


어렸을 때부터 자유라 함은 한국을 벗어나 타국으로 가는 것이라 믿었던 나는 매해마다 꼭 해외로 도망가듯 여행을 떠났다. 금전적 자유는 잃었지만 해방감을 얻으며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믿었다. 하지만 여행은 일시적인 자유를 얻을 뿐 근본적으로 속박된 사슬을 풀기에는 부족했다. 마치 죄수들의 운동시간 같은 느낌이랄까. 항상 부족했던 일탈은 지독한 자유를 탐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꿈은 해외 이민으로까지 이어졌다. 탈 한국이 자유라고 믿었던 것과는 달리 내 인생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평범했다. 남들 다 가는 평범한 4년제를 가고, 워킹홀리데이를 위해 했던 휴학은 등록금을 버느라 바빴고, 복학 후에는 그대로 졸업 후 취직까지 해버렸다. 자유를 꿈꿨지만 성실한 한국인은 끝내 자유를 원하기만 할 뿐 손에 쥐지 못했다.


우리는 자유를 꿈꾸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들에게 눌려 자유를 박탈 당한다. 나에게는 어머니가 그랬다. 우리 어머니는  직장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네가 거기에서 일하게 되서 얼마나 다행인지'  때마다 말하며 끝끝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선택이고,  의지인데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지,   곳에서  나오는지. 그렇게 묻는다면  말이 없다.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없는 이유는 단순하지만  속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점점 자유를 원한다 말했던  고민은 사람들에게서도 나에게서도 흐려져 갔다. 그래서 자유를 찾는 것을 잊지 않으려 혼자만의 내적 사투를 벌였다.  취직  20 후반으로 가면서 매해 퇴사를 꿈꿨다.  나이들기 전에 자유를 찾고 싶다는   이유였다. 심리적으로 방황하고 불안한 회사 생활을 이어나갔다. 충돌하는  가치관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안에서 강하게 부딪쳤고 결국 우울증, 공황장애가 찾아와 회사에서도 회사 밖에서도 제대로 움직일  없었다.


자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결국 내 안에 속박되어 버렸다. 내 안에서의 갈등이 정리 된 건 웃기게도 20대 후반의 끝자락이었던 것 같다. 바로 이 시기에 말이다. 10년을 넘게 한 고민이 5일의 시간 동안 모두 정리가 되었다. 왜냐? 나는 이제 앞자리가 바뀌면서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약속이나 한 듯 30대는 꿈을 찾는 시기가 아니라 말했다. 위에서 말했지만 이것은 세상에게 자유를 박탈당한 셈이다. 퇴사를 결심하자 많은 사람들이 말렸고, 사직서는 천천히 찢겨졌다. 회사 사람들은 '나를 위한다'는 말을 하며 며칠을 설득했고, 평범한 삶을 살아 온 주제에 '자유'를 꿈꿨던 나는 결국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저 멀리서 '자유'가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

"버스는 떠났어"

"다음 버스는 언제 와요?"

".. 막차야.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겠어?"

새벽은 길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잠시 있다가 가기를 강권했고, 나는 혼자 있을 수 없어 그를 따라나섰다.


9의 숫자는 어떤 자유를 버리라 말한다.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삶에 임할 것을 지시한다. 세월에 대한 복종 역시 자유에 대한 박탈을 전제로 이뤄진다. 하지만 세월에 복종하면 생각보다 편안해진다. 정해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타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아주 멀끔한 상품이 된다.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새가 된 전생의 무엇은 반복적인 행동만 하는 길가의 비둘기가 되었고 평온이라는 자유를 찾아 나무가 되었던 전생의 무엇은 무기력하게 죽어 간 고사목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19살에는 곧 다가 올 자유를 기대했고 29살에는 곧 잃을 자유를 걱정했다. 자유를 잃는다니.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소리다. 자유는 실체가 없기에 이동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원래부터 갖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잃어버렸다 생각한다. 잃어버렸다니. 원래 있지도 않았던 신기루였지 않았을까? 아니지, 정신승리를 하고 싶어 이렇게 덮어버리는 떠나간 자유에 대한 비겁한 안부 인사 정도 되겠다.

이제, 39살에는 어떤 자유를 말하게 될까. 어떤 자유를 잃을까 전전긍긍할까.


그나저나 지금 자유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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