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건 그저 단어인걸까.
어렸을 때부터 30살 전에 죽을 거라 다짐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죽고 싶어"
이 바보 같은 생각은 멍청하게도 20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생각이 깊어졌을 때, 너의 죽음이 조용히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너는 많은 이들에게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울 때 죽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 뱉었던 어리석었던 나는 꽃으로 덮인 가장 아름다운 너를 보며 죄의식을 느꼈다. 그 생각은 죄였다. 나는 일평생 누군가에게 죄를 지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올해를 돌아보며 너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여전히 우리 집에는 너와 찍은 사진과 네가 보내 준 편지가 놓여있다. 나는 이제 죽음에 대해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떠나고 나의 삶이 재정립되었다. 나는 너에게 빚을 졌다. 너를 추억하며 네 흔적을 쫒아가다 포기해버렸다. 그것은 어설프게 쓴 반성문 같이 반성하는 척 흉내만 내는 모양새였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네가 그릴 그림을 상상해보았다. 나는 너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 내가 60살 쯤, 지금 네 나이의 너를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것.'
나는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꼭 60세가 되어 지금의 너와 스쳐지나갈 것이다. 좋아했던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너를,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음악을 듣는 너를, 애인과 장난치며 아이처럼 웃는 너와 꼭 스쳐지나갈 것이다. 죽음이 아닌 삶을 생각하며 지난 시간의 죄를 반성할 수 있다면 그럴 것이다. 평생을 너와 만날 준비를 하며 속죄의 시간을 보낼테니 꼭 너는 내가 그리는 그 삶 속에 나타나 주면 좋겠다.
고요하게 겨울이 지나간다. 나는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