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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년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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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 Aug 29. 2022

워크맨의 추억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의 친구에게는 삼성에서 나온 아주 얄상한 워크맨이 생겼다.

카세트 테이프의 크기에 딱 맞춤 한 듯한 작은 사이즈와

한 손에 잡히는 그 감촉은 스틸의 느낌이 아니라

플라스틱의 느낌과 세무의 느낌이 합해진 것만 같았던 그 것.
거기다 진한 초록색에 남색 테투리의 색조합까지 참 예쁜 소형 카세트였다.


부평역 지하상가의 남광장 쪽으로 나가는 계단 입구에

짝퉁 테이프를 파는 노점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내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마음에 드는 최신 팝이라던가, 발라드 명곡은 물론 최신 가요까지

천 원이면 살 수 있었기에 용돈을 모아서 테이프를 하나 사면,

집에 와서 커다란 엄마의 라디오에 테이프를 넣고

되감았다 뒤집었다를 반복하며 열심히 들었다.

야밤에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젖은 일기를 쓰고 싶은 여중생이었지만,

방음이라고는 쥐톨만큼도 되지 않는 낡은 아파트는 음악은 커녕,

윗 집 아저씨의 술 주정 소리와

곧 이어지는 윗 집 아줌마의 울음 소리,

옆 집 동생이 숙제를 하다가 틀려서 제 언니에게 구박받는 소리,

아랫집 남자 애들 둘이 소리 지르며 뒹구는 소리까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생활(?) 소음으로 이미 가득차 있었기에

음악을 틀 여지가 없었다.

친구에게 사정사정하여 그 카세트를 일주일을 빌렸다.  


두 귀를 세상으로 부터 차단하고

음악이 흐르는 밤이 주는 평온함은 환상적일 정도로 달콤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친구에게 워크맨을 돌려주러 갔다.

친구네 반을 찾으니 청소중이었던가, 점심시간이었던가......

친구는 보이지 않았고 맨 앞자리에 친구 가방이 보여서 그 아래에 워크맨을 찔러두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하교 길 만난 친구가 나에게 워크맨을 달라고 했다.

아 뿔 싸.

직접 전달해주지 못한 내 불찰이었다.

아니면 내심 돌려주기 싫었던 내 욕심이 부른 화일지도 몰랐다.


미안하다고 하는 내 앞에서 친구는 아빠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며 길길이 날뛰었고

죄인이 된 나는 학교 구석 구석, 화장실 등등을 찾다가 결국 교무실 분실물 센터로 갔다.

있을리가 없다.

그나마 내가 책상에 두고 가는 걸 본 친구가 있어서 말은 해주었지만

이미 나는 무책임한 아이이거나, 내가 가져간 거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게 된 상태였다.
 

그날 밤에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당장 그 돈을 어떻게 물어주나였다.

항상 가난에 찌들었던 생활에서 억울함은 돈 앞에 비할 게 아니었다.

억울한 감정쯤이야 내 속이 썪어 문드러지고 남이 뭐라해도

당장 돈이 나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 시절은 그 정도로 절박하게 가난했다.


엉엉 우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장롱을 뒤져 속곳을 하나 꺼내셨다.

그 속곳 주머니 안에서 작은 헝겊 지갑을 꺼내시더니

그 안에 꼬깃꼬깃 뭉쳐있던 돈 십만원을 주셨다.

그걸로 어떻게 안되겠냐며.
 

하도 울어서 딸꾹질을 해가며 그 돈을 받은 난

다음 날 친구에게 사과하면서 새로 사주겠다고 했고,

친구의 아버지가 8만 5천원을 주고 샀다기에 더 묻지도 않고 돈을 건네줬다.  

그 일이 있고, 나는 그 친구와 다시 가까워지지 못했고

가족들도 아무도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


그 가을 10월, 내 생일이 되던 날이었다.

아빠가 내민 두툼한 꾸러미를 풀어보자 최신형 분홍 테두리가 있는 '아하프리'가 나왔다.

그 날 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황홀한 시절이었나.
 

동네 언니가 그 위의 언니에게 물려받아 입었던 그 교복을

다시 내가 물려받아 입었는데

치마 솔기가 헤져서 늘 하얗게 테두리가 생겼었다.

엉덩이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던 그 낡은 교복을 입고,

친척 오빠에게 물려받은 운동화를 신고,

부평역 지하상가에서 샀던 만 오천원 짜리 가방을 맸지만,

최신형 아하프리 카세트를 틀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등하교를 했던 그 때.
 

아침에 수돗물을 받아 팔팔 끓여서 찬물과 섞어 머리를 감고 집을 나서는 그 길.

강아지 오줌이 얼룩지고

밤새 누군가가 술을 먹고 토해놓은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낡고 더러운 골목길을 지나면서도 세상은 빛이 났었다.
 

가난하고 남루한 행색의 여고생이었지만

심장이 생생하게 살아있던 시절.

언젠가는 나에게도 환하게 빛나는 날이 올거라고 믿으면서

늘 꿈을 꾸듯 지내던 그 시절.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걸어다녔던 그 때.


얼마나 빛났을까.

얼마나 예뻤을까.

그 빛남을 나는 알지 못하고 지나갔겠지.


가끔은,

그 시절의 내가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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