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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세현 Nov 21. 2022

30초쯤 기다려주기

뭉근하고 담백하게

“난 내가 그리고 싶을 때 그리지, 누가 그려달라고 하는 건.”


희끗한 주인아저씨가 손을 내저었다. 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 않으면서 사는 곳, 동해시이다.


동해시. 동해에 있어서 동해시다. 이렇게 담백한 이름이 또 있을까.

파란 바다에 빨간 해가 솟구치는 그림. 이게 동해시의 로고이다. 그래 딱 너다.


놀랍게도 방금 저 말의 주인은 식당의 주인이다. 철문을 드르륵 밀어야 입장할 수 있는 곳. 앞에는 양미리와 노장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곳. 들어와 식사하고 가시라 영업멘트 한번 해본 적 없으실 것 같은 할머니 사장님이 도루묵찌개를 파는 곳이다. 누리끼리한 벽 곳곳에 꽤 실력자의 동물과 사람 그림이 곳곳에 붙어있다. 그 주인아저씨 것이다.


도루묵찌개를 먹는 서울서 온 젊은 여자. 찌개 사진을 찍어대는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사람들. 옆자리에서 혼술을 하던 할아버지는 자꾸 내게 뭔가를 권했다. 이 할아버지는 이런 걸 혼술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지? 난 혼밥을 하는 중인데..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술 마시고 바다에 나가면 도루묵 배꼽 있는 곳을 두고 양손으로 가른대. 그러면 알 끈적이는 게 주루룩. 그걸 서너 마리 마시면 술 마신 지도 모른다는 거야. 이렇게 사람 살아가는 방법이 참 달라. 우습지?”


“관음사 그쪽에 가면 금강산 보다 더 좋아. 매표소 뒤 길을 따라서 걸어가면 되는데 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거길 찾아와. 아가씨도 다음에 한번 가봐.”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이런 거 먹을 줄 모르는데. 아가씨는 어쩜 이런 걸 이렇게 잘 먹어? 먹는 방법을 이미 아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의 삶에 간섭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다정도 하다. 이 식당 쪽으로 넘어올 때 하루에 열 번쯤 버스가 오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 탔는데, 이런 곳에서 버스를 타는 나에게 기사님이 이것저것 물어볼까 싶어 긴장하고 있었다. 나도 어디 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데 어디 가냐며 이것저것 물으면 뭐라고 답하지?  아무 데나 내릴 작정인데 여기서 내리라고 하면 어떡하지?


다행히 버스는 조용히 출발했고, 하지만 몇 초쯤 뒤 기사님이 말했다. “아가씨, 이 버스는 다음 정류장까지 밖에 안 가는데 아가씨 알아요?” , “…….”.


“내가 다음 기사한테 전화를 해줄 테니까, 카드 찍지 말고 타요. 알았죠?”, “.. 네, 감사합니다”


호의였다. 간섭 0% 호의 100%였다. 너무 당황스럽다. 이런 걸 받아본 게 언제였지? 그때부터 내 마음은 단팥죽처럼 뭉근하게 끓기 시작했다. 버스서 내려 찾아간 여행 책방. 어떤 책을 찾는 손님의 전화. “아, 저희는 여행 관련된 책만 파는 서점이라서요. 00서적에 전화 한번 해보시겠어요?”


두둥.. 이 도시는 왜 이럴까. 당황스럽다. 또다시 순도 백퍼센트 호의이다. 사장님은 역전 근처 이곳을 찾은 나에게 여행을 시작하는 건지 끝내는 건지 물으며 시티투어 시간표를 에어드롭으로 보내주기도 하고, 이곳에 관련된 글 한편을 읽고 가길 권했다.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싶어 조용히 보내는 것, 이런 게 수도권 스타일일걸?


욕심 내지 않고 2.4km짜리 짧은 산책길을 걷다가 사진을 찍자 옆에서 사진 찍던 아저씨가 묻는다.

“ 예뻐요~? “


푸훕… 동해시, 역시 너구나. 이제 나도 널 파악했다. 동해스타일. 이번엔 나도 방긋 웃으며 답하고 여기 호랑이 얼굴바위가 어딨냐고 묻자 우린 그런 건 모른단다. 하지만 내려가서 오른쪽을 보면 뭔가 있긴 있을 거란다.


갑자기 조금 서늘해졌다. 내게 반복된 호의가 곧 있을 불합격 통보에 대한 신의 위로가 아니길 바랬다. 이건 그저 강원도 동해시 스타일이다. 요새는 어디 가면 근처에 절이 어디 있나 보고 적당한 곳이 있으면 들어가서 기도를 한다. 나 합격 좀 시켜달라고.  어떤 영험한 이태원 타로 점쟁이의 권유 덕분이다. 조상덕이 있을 것이니 조상님께 절을 올리라고 했거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기도를 올릴만한 조상이 없는 거다. 그 점쟁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평안하시길 빌라고 했는데,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 내 존재를 모르신단 말이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몇 번 기도하다가 여기 감추사 용왕각에서 박수를 쳤다.


그래, 바닷가에서 태어나 심란할 때 좋을 때 바다를 찾는 나에게 용왕님이 내 조상 아니겠어? 간절히 기도해본다. 제발 나 좀 합격시켜달라고. 혹시 불합격이거든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시라고.


휴우…


이곳의 버스들은 사람이 많이 타는 시내에서는 당장 타는 사람이 없더라도 30초쯤 섰다가 간다.  뭉근하고 담백하게, 그렇게 살란다. 초록색 파도가 뒤로 물렀다가 삼키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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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것은 많아질 테지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졌듯이

이제 다시 또,

어느 곳에서 우리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바다처럼 그렇게 바다처럼

바다처럼 그렇게 바다처럼


루시드폴, 바다처럼 그렇게

(여행책방에서 들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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