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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임신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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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 Dec 16. 2018

[임신일기 #1] 두 줄

거짓말처럼 내게 온 선물

식탁 위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있다. 의아한 생각으로 뚜껑을 열어보니 노란, 정말 노오란 귤이 가득 담겨있다. 상처 하나 없이 동글동글 예쁘게 생겨서는 반지르르하게 광까지 나는 노오란 귤. 너무나 먹음직스럽게 담겨있는 귤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신나서 귤을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근데 이 귤은 누가 시킨거지? 택배 시킨 적 없는데...






갸우뚱 하는 찰라에 눈을 떴다. 꿈이구나.


'임신했나?'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이 생각이 들었다. 먹지는 않고 어루만지기만 한 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모든 날짜를 다 기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들어 이상하리만치 그 날을 기록하고 있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특히 우리가 애용하는 초박형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날 만큼은 더욱 꼼꼼히 적어놨드랬다. 워낙 생리 주기가 긴 편이고 불규칙한 편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이 쯤 되면 했어야할 생리를 하지 않은 것도 의심스러웠다.


"자기야, 나 임신했나봐요."
"왜요?"


꿈 이야기를 했다. 종종 예지몽이랄까 꿈과 어떤 현상의 연관성, 신비로움을 이야기 할 때가 있는 나와는 달리, 신랑은 꿈이 현실과 어떤 인과관계 등이 있을리 없다, 머릿속에 있는 수 많은 기억들이 자는 동안 정리되면서 섞여서 창조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번에는 꿈과 임신을 연결하는 나에게, 신기하게도 "정말 태몽인가?"라며 맞장구를 쳤다.


테스트를 하려면 약국에 가야하는데, 몸이 나른하고 나가기도 싫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추운지. 바닥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낮시간인데도 거실에 보일러를 올리고 이불을 꺼내와 덮고 누웠다. 어차피 검사는 아침에 해야 하니까 좀 더 이따가 사와도 괜찮겠지. 만사 귀찮고 일도 손에 잘 안 잡히던 중 전화가 왔다. 엄마가 택배로 뭘 좀 시켰는데 양이 많다며 나눠주러 오신다고.


"엄마, 온 김에 차 한잔 마시고 가."


거지 발싸개 같은 모습을 추스리고 대충 주변 정리를 했다. 물을 끓이고 나의 필살기 냉동 호떡을 꺼내 후라이팬에 구웠다. 희안하게 커피를 마시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 잔은 차를, 두 잔은 커피를 내렸다. 한 시간 정도 엄마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피곤하고 눕고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분명히 뭔가 달라졌다. 확인을 해봐야겠다.


자기야, 약국에 가야겠어요.


함께 가까운 약국에서 임신진단키트를 샀다. 약국에 가니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2주 전에 이 곳에서 해열제를 샀던 것이.






2018. 12. 05


집에서 신랑과 둘이 일을 시작한 이후에 생활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다. 가정집이다 보니 이사, 인테리어 공사, 보수 공사, 주변 학교 종소리 등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은지 오래된 빌라라 더욱 그렇겠지만 누군가 복도를 걷는 소리, 택배 상자를 내 던지는 소리, 주변 집 사람 재채기나 웃음 소리까지 들릴만큼 방음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온 세상이 조용해지는 저녁에 집중이 더 잘 되었고, 일하는 시간은 늦은 오후부터 새벽까지로 거의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다보니 잠에서 깨는 시간은 보통 오전 11시 쯤이었다.


9시도 되기 전, 이 날은 참 이상하게도 눈이 번쩍 뜨였다. 괜히 심장이 쿵쾅 뛰었다. 곤히 자고 있는 신랑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진단키트를 꺼내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조용히 키트 뚜껑을 열었다. 갑자기 설명충이 고개를 내미는 것일 수도 있는데 잠깐 설명을 하자면, 진단은 아침 첫 소변으로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소변을 보기 시작해서 초반 조금은 흘려 보내고 잠시 참았다가 중간 쯤부터 나온 소변을 키트에 테스트가 가능한 부위에 묻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뚜껑을 덮고 키트를 뒤집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또 내 쉬었다.


'제대로 되고 있는 건가?'
'지금 확인 할까?'
'나중에 같이 확인할까?'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쳤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키트를 다시 바로 잡았다.



얼마동안 멍하니 변기에 앉아 있었다. 뭐지? 두 줄이다. T 자리에 선명하게 빨간 줄이 생겼다. 뭐야, 진짜 임신이잖아. 임신 한 건가봐. 와, 진짜 임신인가봐? 와... 어떡하지?


잠이 달아나버렸지만 일단 다시 자리에 가서 누웠다. 눈을 감고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실눈을 뜨고 신랑을 바라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될꺼라는 벅찬 감정과 지금 우리 상황에 아이 키울 돈을 어떻게 마련하나 싶어 답답함이 동시에 짬뽕이 되어 복잡했다. '자기야, 이 와중에 잠이 와?'를 잔뜩 시전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거리고 있는데 "임신이에요?" 라며 신랑이 조용히 물었다.


"어땠으면 좋겠어요?"


한 동안 우리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기쁜데 마냥 기쁠 수 만은 없는 이 복잡하고 묘한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는 멋진 회사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한동안 임신 시도를 했었지만, 어느정도 회사가 자리를 잡으면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초박형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래, 어느정도 자리잡고 난 후에 다시 시도하자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다 딱 하루, 서로의 감정에 취해 도구를 멀리했던 그 날, 11월 14일. 이 아이가 우리에게 왔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바로 다음 날인 15일부터 몸이 이상했다. 어지럽고 계속 누워있고만 싶었다. 날이 흐리면 어지럽거나 두통이 종종 있던터라 그냥 좀 어지러운 것이겠거니 싶어서 증상을 무시했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 어지럼증이 가시질 않았다. 시어머님 생신이라 가족들과 식사 약속을 미리 잡아두었기에 먼 이동 길에 발을 옮겼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평소보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더니, 다 늦은 밤에 괜히 허기가 지고 단 게 막 당겼다.


다음 날은 어지럼증이 심해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어머니 음식이 입맛에 너무 잘 맞아서 항상 과식을 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 번엔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을 몇 수저 뜨고는 바로 자리에 누웠다. 감기에 걸렸나? 먼 길을 이동해 와서 지친 건가? 요즘 운동을 잘 안했더니 체력이 많이 약해졌나보다 싶었는데 신랑이 열을 재보자며 체온계를 가지고 왔다.


삐빅. 37.6도.

열이 꽤 있다. 감기인가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해열제를 샀다. 약사는 독감일 수 있으니 약을 먹어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미루지 말고 병원에 가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약사에게 임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몰랐으니까. 그 후 이틀간 하루 한 알 씩 해열제를 먹었다.


열은 이틀만에 금새 내렸지만 여전히 몸이 나른하고 축축 쳐졌다. 몸에 변화가 생겨서 꿈에도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귤 꿈 덕분에 빨리 테스트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싶다. 두 줄을 확인하는 순간, '아가, 엄마가 먹은 해열제가 너에게 나쁜 영향을 주진 않겠지?'라는 걱정이 앞서 속이 상했지만. 가볍게 생각했던 증상들이 내게 아이가 생기는 과정을 알리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초보 엄마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 내 몸에 오는 변화를 조금씩 글로 남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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