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장점이 많으니까, 그걸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마음속에 강한 태풍이 휘몰아칠 때,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기를 보낸다. 어떤 이는 태풍에 맞설 장비를 갖추고 태풍의 눈으로 뛰어가고, 어떤 이는 몸을 최대한 납작하게 만든 뒤 잔뜩 웅크리고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린다고 한다. 태풍에 맞서는 사람만이 용기 있는 것은 아니며, 웅크리고 있는 사람만이 현명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고민 끝에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찾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저 거대한 태풍이 지나가 이전의 평온한 상태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과거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태풍에 맞설 장비를 갖추고, 온몸이 부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태풍을 정면으로 맞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 더 강해진 나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시간이 지나 태풍은 점점 커졌고,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갖추고 체력을 키워도 강해지는 태풍에 맞서기는 쉽지 않았다. 태풍이 지나간 후는 또 어떤가.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을 재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밭에 꽃씨를 심어놓는 것과 같았다. 언제 씨앗이 뿌리를 내릴지, 언제 다시 집이 지어질지, 언제 다시 전기가 들어올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태풍이 오면 맞서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웅크리기도 하면서 그저 그렇게 태풍이 지나가길 바라기로 했다. 가끔은 예보를 못 보고 집이 물에 잠길 수도 있고, 태풍에 날아간 지붕을 잡으려다 그곳에 정착할 수도 있다. 때로는 태풍인 줄 알았는데 여우비일 수도 있고, 오히려 미세먼지를 걷어주는 바람일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순리대로, 흘러가는 대로, 때가 되면 그때에 맞는 일을 하면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 초조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꼭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는 없다. 위기가 닥치면 나를 흐릿하게 만들고 보호색으로 주변과 비슷하게 만들어 안정감을 찾을 때까지 숨죽이고 있으면 된다.
누군가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는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어'란 나의 말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이었는데 무엇이 그를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그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파하는 그를 보니 내가 뭔가 굉장히 큰 결정을 가볍게 한 건가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바꾸려 부단히 노력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산다는 건데. 아 물론, 나의 '그냥 그렇게'라는 말은 그의 추측대로 많은 것을 체념한다는 뜻이 조금 섞여있긴 하다. 아주 조금. 근데 뭐 별 수없지 않은가. 태풍은 오고, 나는 그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데.
회사 점심시간에 오랜만에 단장님과 식사를 했다. 한동안 우울감에 외부와의 모든 교류를 차단하고 고립된 시간을 보냈을 때도 꾸준히 밥 한 번 먹자고 말씀해주신 덕에 어두운 시기를 빠져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이 났다. 그동안 밥 약속을 피한 걸 눈치채고 서운해했을지 모르는 단장님을 위해 설명을 해야 했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체력이 고갈되었고, 정신력도 많이 소진되어 한동안 번아웃에 가까운 슬럼프였다. 지금은 괜찮다.'라고 가볍게 말했었는데 단장님은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봤을 때 내가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지금은 괜찮은지, 많이 안 좋았는지 물어보셨다.
그러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단장님이 조용히 읊조리듯 날 보고 말씀하셨다.
'너는 장점이 많으니까, 그걸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 외의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은 아주 간단한 말이었는데 그 순간 난 이 문장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나는, 장점이 많고, 그걸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저 문장의 단어 하나 쉼표 하나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말씀하셨을까. 화려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가장 기본에 충실한 저 쉬운 단어 몇 개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문장이 마음에 강하게 박혀 음절 하나하나가 오늘의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는 건 사실 지금까지의 내 선택과는 다른 방향이었기에 밝고 긍정적이기보다는 조금 침잠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단장님의 한마디는 물속으로 가라앉아있던 내게, 사실 너는 아가미도 가지고 있어!라고 하는 듯했다. 물속에서의 나는 산소가 없으면 숨을 못 쉰다고 생각해왔지만 단장님의 말에 숨겨져 있던 아가미가 자라나는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는 문장의 정반대의 해석이었다. 어쩌면 그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는 원래 양 극에 있었는데 내가 한쪽만 집중해서 본다고 다른 한쪽을 전혀 인지하지 못해 왔던 게 아닐까.
너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라든가, 굳이 노력할 필요 없어라든가, 너는 멋진 사람이야라든가 하는 구구절절한 말보다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나를 감싼 저 문장들이 오늘의 나를 얼마나 따뜻하게 만들었는지 단장님은 아셨을까. 겨울이 되면 내가 좋아하는 핫초코 하나 아주 진하게 타서 단장님 자리에 슬쩍 놔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