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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개 Mar 13. 2018

불편함과 낭만의 동행

기차 여행의 즐거움

문득 스리랑카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여행의 시작, 콜롬보 역에서 / copyrightⓒ. 2017. 베개.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가득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여 책상에 앉았을 때, 문득 스리랑카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인터넷 서핑 중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무의식 중에 떠올랐던 탓일 것이다. 머릿속 잔상에 남아있던 그 사진에는 낡은 기차가 초록빛 들판을 누비고 있었다. 색이 바랜 붉은 빛의 그 기차를 타면, 숨 가쁘게 도심 지역을 연결하는 지하철에 영혼 없이 실려 다니는 일상에서 벗어나 예상치 못한 모험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 줄 것만 같았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태어난 내 또래들이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내일로 여행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내일로 티켓은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무궁화 호, 새마을 호를 7일간 자유로이 탈 수 있는데, KTX와 같은 고속열차가 아닌 느린 완행열차를 타고 갖가지 간이역을 다니며 전국을 일주하는 재미가 있었다.


당시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친구와 나는 별다른 계획 없이 내일로 열차 티켓을 구매하고 다소 즉흥적인 마음으로 부산에서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서 시작된 기차 여행은 전라도 담양, 전주를 거쳐 수도 서울을 찍고, 경기도 끝자락에 있는 파주로 이어졌다. 난생처음 강원도를 가게 된 것도 이때였다. 야간열차에서 자리가 없어 객실 사이 연결 부분에 쪼그리고 앉아 꼬박 새우잠을 자기도 하며 그렇게 전국을 한 바퀴 돌았던 기차여행은 오래도록 그 여운이 내 마음에 맴돌았는데, 쳇바퀴 같이 돌아가는 직장인의 일상 중 문득 그때와 같은 기차여행이 그리워진 것이다. 불편하지만 낭만이 서려있는 기차 여행을.



해안가를 따라 달리는 기차 / copyrightⓒ. 2017. 베개.



우리나라 면적의 2/3 정도 크기인 눈물 모양의 스리랑카 섬. 이 나라를 한 바퀴 돌기에는 내가 쓸 수 있는 휴가일수가 충분하지 않아, 콜롬보에서 시작하여 해안가를 따라 기차를 타고 남쪽을 둘러보고, 다시 중부 내륙지방 고원을 거쳐서 콜롬보로 돌아오는 루트를 택했다. 일반적으로 스리랑카 여행자들이 택하는 루트를 역행하는 방향이었다.


과연 스리랑카에서의 기차여행은 가난한 대학생의 완행열차 여행만큼이나 불편함이 뒤따르는 선택이었다. 최고속도 305km 라고 하는 KTX의 속도에 비해 스리랑카 열차는 시속 40km로 일반 버스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여행에서의 불편함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기억의 흔적을 새기게 된다. 느리기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을 수 있고, 옆자리를 나눠 타는 이와 오랜 시간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어쩌면 빠른 속도와 안락함을 포기하고 느림과 불편함을 택한 덕분에 '여행의 낭만'이 선물처럼 주어진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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