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너와 나에게
밀양 성폭행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고등학생들 수십 명이 중/고등학생 여자아이들을 일 년 가까운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성폭행하고 폭력에 협박, 금품갈취까지 서슴지 않았던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하지만 가해자들은 미약한 처벌을 받는데 그쳤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무책임한 수사과정 속에서 억울한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고, 또 어떻게 이런 끝맺음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끔찍한 사건. 네. 맞아요. 오늘 소개할 영화는 이 이야기를 스크린 위에 옮겨놓은 영화, <한공주>입니다.
어느 학교의 교장실. 한 여자아이가 불안한 듯 앉아있고, 많은 어른들이 그 아이를 둘러싸고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가운 시선 속에서 여자아이는 쭈뼛쭈뼛 입을 열어요.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라고요. 하지만 그 아이는 쫓기듯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마음속 깊이 남 모를 상처를 간직하고 사람들과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지려 하지 않는 아이.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번갈아가며 차분하게 보여주죠.
현재의 그녀는 쉽게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아픔을 안고 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씩 상처를 딛고 일어나고자 노력합니다. 천천히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따뜻한 시선과 손길을 교환하죠. 한 때 그녀에게서 멀어졌던 평범한 삶은 그렇게 그녀 곁으로 조금씩 돌아오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사이사이에 비추어지는 과거의 그녀는 예정된 비극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갑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벌어지지 말았어야 할 끔찍한 사건이 눈 앞에 또렷한 영상으로 펼쳐지는 것을 무력하게 기다리는 것뿐이죠. 그리고 그 광경과 맞닥뜨리는 순간, 누군가는 화면으로부터 눈을 돌릴지도, 혹은 가해자들을 향한 분노를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동시에 하나의 물음표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들을 이 지경까지 몰고 왔을까, 하고요.
<한공주>는 많은 사건사고들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뜨거운 울컥함을 또렷하게 들이붓는 영화입니다. 군데군데 묻어나는 따스한 온기조차 불안한 두근거림에 지배당하고, 마지막 장면과 그 위에 덧씌워지는 짧은 내레이션 앞에서는 그동안 속에 억눌러 왔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까지 듭니다. 울렁이는 분노. 대체 이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요.
어쩌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대부분 비겁할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있어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니까요.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해석되고, 내가 살기 편한 방향으로 정의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위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 이기심과 나의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타인이 크고 작은 상처를 받고 아픔을 감내하고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영화 속 가해자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도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고 눈을 질끈 감고 싶어 집니다.
한공주.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영화의 제목은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들 개개인을 지칭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한공주>는 불편하지만 직시해야 할 현실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아 우리의 두 손 위에 얹어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서로에게 받은 것은 상처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는 것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에게 한 번 감상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것일 테고요.
영화 속 공주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국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고, 그 세상을 밝게 혹은 어둡게 만드는 것 또한 다름 아닌 우리들의 행동일 겁니다.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의 어두운 빛을 보고, 세상을 밝은 빛으로 채워가야겠다는 마음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