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니크 Mar 31. 2022

에펠탑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쇼팽 왈츠 Op.64, No. 2


알록달록 찍힌 도장들이 여권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여행을 좋아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을 한 바퀴 돈 정도 있고 코로나19라는 역병이 세상을 뒤덮기 전까지는 거의 매 년 해외여행을 했지만 정작 대학생들도 배낭 메고 떠나는 파리에 가 본 적은,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모두가 보고 모두가 잘 아는 에펠탑, 굳이 나까지 비싼 돈 내고 10시간 비행기 타고 가면서까지 볼 필요가 있나? 같은 돈 같은 시간이면 요즘 힙 좀 떠는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베를린이나, 공항 이름조차 쇼팽인 바르샤바 같은 도시가 나에게는 더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휴가 여행지를 정할 때마다 늘 뒷순위로 밀리던 파리 여행을 결심한 건 몇 년 전. 실은 해리포터의 나라 영국만 가려는 계획이었는데, 비행기 표가 런던 왕복보다 런던 입국-파리 출국 표가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엉겁결에 에펠탑을 보러 갔다. 직접 본 에펠탑은 어땠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저 멀리서 봐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압도적인 크기의 아름다운 모양의 탑에 저녁이 되어 불이 들어와 반짝거리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아, 좋았다.




쇼팽 왈츠 64-2. 피아노를 배우며 나에게는 이 곡이 에펠탑과 같은 존재였다. 제목만 들어서는 이 곡이 낯설 수 있는데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본 사람이라면 귀에 익은 곡이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음악 학교에서 '피아노 왕자'와 서로 번갈아 가며 피아노를 치는 배틀 장면에서 편곡되어 짧게 연주되는데, 몇 초도 되지 않는 그 순간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 쇼팽 특유의 멜로디가 한번 들으면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2:13부터 쇼팽 왈츠

영화를 본 뒤 혼자 악보를 보며 주걸륜이 된 듯한 기분을 내며 어떻게든 쳐보려 했는데, 당시 실력으론 샾(#)이 4개나 붙은 이 곡은 악보 그대로 건반을 누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마음 속 한 켠에 묵혀만 두던 곡을 다시 꺼내준 사람은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쇼팽 콩쿠르 우승자 라파우 블레하츠였다.


블레하츠의 연주를 듣고 나는 이 곡에 푹 빠졌다. 뒤늦은 짝사랑이었다.


대중가요가 그렇듯 클래식 곡도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는데, 이 곡은 그런 거 없이 같은 멜로디가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속 반복해서 듣는데도 좋다. 특히 블레하츠의 연주는 같은 멜로디도 해석을 다르게 하면서 지루하지 않고 쇼팽 특유의 루바토를 기가 막히게 살리면서 작곡가가 악보에 적은 지시를 왜곡하지 않는다.


가령  다른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게릭 올슨의 같은 쇼팽 왈츠 연주( 영상)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쇼팽 특유의 아름다움은 과소 표현하고 루바토가 지나치게 들어간 부분들은 쇼팽의 작곡 의도를 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반복되는 멜로디를   다르게 해석한 노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쇼팽 콩쿨 우승자의 연주라면 반론의 여지가 없는 해석일 수 있지만 나는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이런 연주를 좋은 연주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레슨 시간 막바지 틈새 시간에 선생님께도 여쭤 보니 결국 정답은 없으며 그 날의 연주가 청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해석이었는지에 따라 다를 것 같다고 했다. 일단 나를 설득하지는 못한 연주였으니 나에게는 좋은 연주는 아니지만, 이 연주에 설득당한 누군가에게는 훌륭한 연주였을 것이라.




이 곡을 포함한 <말할 수 없는 비밀> OST 곡들은 취미생들에게는 단골 레슨 곡이다. 쇼팽 왈츠 64-2 역시 굳이 따로 찾아 듣지 않아도 연습실에 앉아 있으면 여러 번 들을 수 있다. 돌림 노래처럼 들리는 게 거의 '브람스 인터메조' 급이다. (아래 글 참고)



이 곡을 연습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연습을 마치고 나왔는데 학원 선생님이 웃으면서 "다른 수강생 분이 같은 곡을 연습하는데, 어디선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서 연습하다 말고 나왔대요"하고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악보를 먼저 본 사람이 더 늦게 본 사람보다 템포를 올리거나 음악을 만드는 게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데, 그럼 다른 연습실에서 같은 곡을 연습하는 후발주자는 연습을 하기가 멋쩍은 상황이 생긴다. 이건 마치 학창 시절 데자뷔 같기도 한 게 노래방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데 옆 방에서 가수 뺨치는 누군가가 열창을 하면 원래 끝까지 부르려다가 그냥 1절만 부르고 끊는, 그런 느낌이랄까. 본의 아니게 피아노로 열창을 하는 사람이 된 셈이라 나도 괜히 머쓱해졌다.


사실 이 곡은 아직도 연습하고 있는 곡인데, 최근 이직 후 퇴근이 늦어 연습을 못하고 있어 녹음을 앞두고 영 완성도가 올라가지 않아 초조하다. 라파우 블레하츠처럼 연주하고 싶어 몇몇 마디는 루바토를 따라 해 봤는데 오히려 손만 더 꼬여서 결국 기본이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다시 접었다. 이미 수 없이 들은 곡도 나만의 해석으로 연주해보는 경험은 사진으로만 보던 에펠탑을 실제로 봤을 때 감동을 느꼈던 것처럼 또 다른 것이니까. 피아노를 치는 긴 여정에 나만의 에펠탑을 우뚝 세워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