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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Nov 28. 2021

비인기 멤버를 좋아하는 마음

차이코프스키 사계 12월 '크리스마스'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고 계절이 두 번 정도 바뀌었을 때쯤, 나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소품집 <사계>에서 두 곡을 친 상황이었다. 제일 유명한 두 곡을 쳤기 때문에 다음 곡은 무엇을 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레슨 선생님이 권해주신 곡은 같은 소품집에 실린 12월 '크리스마스'였다. 사실 처음에는 흥미가 없었다.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을 때 연달아 친 세 곡이 쿵짝짝 쿵짝짝 3/4박자의 왈츠였기에 당분간 왈츠는 치고 싶지 않았지만, 때 마침 겨울이었고 그동안 주로 우울하고 무거운 단조 곡들을 쳤었기 때문에 즐거운 곡을 치면 좋을 것 같아 '12월'을 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건 '12월'도 조성은 단조다.)


조성진, 차이코프스키 사계 12월 크리스마스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 협주곡 1번, 교향곡 '비창', 호두까기 인형 등 발레극에 쓰인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다. 그래서 '12월'이 실려 있는 소품집 <사계>는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까지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차이코프스키 본인 조차 엄청난 정성을 담아 이 곡을 쓴 것 같진 않다. 1876년 러시아의 음악잡지 <누벨리스트>에서 매 달 특색에 어울리는 시를 선택하여 그 시의 성격을 묘사한 피아노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를 해서 <사계>의 12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월간 윤종신의 클래식 버전인 셈이다.


  <사계>에서 제일 유명한 곡은 10월 '가을의 노래'다. 유튜브에 검색해보면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모 아이스크림처럼 정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한 걸 들을 수 있다. 곡이 짧으면서도 풍부한 감성이 느껴지기에 주로 리사이틀 후 앙코르곡으로 연주하곤 한다. 조표가 많이 붙어있지 않고 (플랫 2개), 테크닉적으로 크게 어려운 부분도 없고, 곡 길이로 짧아서 (악보 3페이지) 이전 편에서 이야기했던 브람스 인터메조 118-2처럼 학원 연습실에서 자주 들리는 곡이기도 하다. 그 외에는 내가 <사계>에서 제일 좋아하는 곡이자 <쇼코의 미소>, <밝은 밤>을 쓴 소설가 최은영이 좋아하는 곡으로도 꼽은 6월 '뱃노래'가 유명하다.


  <사계>를 아이돌 그룹에 비유하자면 10월과 6월은 인기 멤버, 12월은 비인기 멤버다. 12월을 연습하며 참고 연주를 찾기 위해 유튜브에 여러 번 검색해봤지만 이름 들어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는 채 5개도 찾기 힘들었다. 당연히 취미생들의 연주도 찾기 어렵다. 비인기 멤버의 설움이란 이런 건지... 소품집의 한켠에 조용히 존재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인기 멤버들(6월, 10월)이 여러 번 연주될 동안 거의 찾아주지 않는 소외까지. 그런 취급을 받기에는 억울할 정도로 이 곡은 듣기도 좋고 직접 쳐보기에도 재밌다.



 

  초반 A부분은 어린 소녀들이 난롯가 앞에서 크리스마스의 밤을 만끽하며 춤을 추듯이 따듯하고 경쾌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소녀들은 폴짝폴짝 왈츠를 추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성격이 급한 나는 왈츠가 아니라 스텝을 현란하게 밟는 탭댄스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실 건반 위 과속은 나의 고질병 중 하나다. 연주를 시작할 때 머릿속으로 계산했던 박자가 악보 한 페이지가 지날 무렵에는 점점 속도를 높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손가락이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빨라져 결국 폭망하는 지경에 이르는 과속병.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 지 2년이 되도록 고쳐지지 않는 것 보면 불치병인가 싶기도 하다.


주요 과속구간 1
주요 과속구간 2

  어쨌든 폭망을 막으려면 어떻게든 치료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찾은 방법은 일단 프로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반복해서 들으며 곡의 원래 박자를 머릿속에 때려 넣는다. 그리고 연주를 하는 동안 마음속으로 곡의 주 선율을 노래 부르면서 박자를 놓치지 않게 조절한다. 이 방법을 잘 사용하면 박자가 아주 일관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왈츠풍의 A부분이 지나면 왼손과 오른손이 주 선율을 주고받는(노란색 표시) B부분이 나오는데 나는 특히 이 B부분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조성진이 연주한 버전을 좋아하는데 중간중간 숨을 쉬고 지나가는 부분(파란색 표시)들이 좋아서 똑같이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C부분은 코다로 곡의 피날레를 밝게 장식해야 하는 분위기다. 12월은 내가 그 당시 배운 곡들 중 가장 길고 어려운 곡이었다. 악보가 7페이지 정도 되다 보니 이 곡의 원래 속도가 느린 편이 아닌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면 5분 가까이 되는 곡이다. 당연히 내 연주의 러닝타임은 더 길다. 조표도 플랫 4개가 붙어 있는데 곡이 빠르면서도 길다 보니 음악을 만들어보기 전에 미스터치부터 줄이는 게 미션이었다. 피아노를 치려면 체력도 좋아야 하는구나. 깡마른 체구로 40분이 넘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과 같은 곡을 힘 있게 치는 임동혁, 손열음과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껴졌다.


  A-B-연결구-A의 반복 연주로 이미 넉다운이 된 나에게 팡팡 폭죽 터트리듯 피날레를 장식할 체력이 남아있지 않아 다 죽어가듯 C부분을 연주하니 곡의 맛이 잘 살지 않았다. 16마디 동안 p(피아노)로 시작해 4마디씩 점점 상행하는 선율과 함께 다이내믹도 잘 살려야 하고, 게다가 내가 어려워하는 3화음을 넘은 4화음이 등장할 때는 오른손 음들을 정확하게 짚으면서 f(포르테)를 살려줘야 하는 클라이맥스까지! 체력이 달려 오른손이 하행하며 스타카토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미스터치의 연발이었다. 곡을 완성하기 위해 나중에는 내 멱살을 내가 잡고 끌고 가듯이 어떻게든 곡이 끝날 때까지는 손가락이 헛손질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꽤 오랜 시간 연습했는데 그래서인지 학원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 영상을 남길 때에는 미스터치가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이 곡을 치면서 하나 바랐던 게 있었다. 학원에서 연습하다 보면 옆 연습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예전에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3번을 연습하다가 집으로 가려는데 학원 원장 선생님이 "OO 씨 연습하는 것 듣고 다른 수강생 분도 이 곡 시작하셨어요."라고 말해주셨을 때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나의 장점 중 하나는 높은 메타인지라서, 내 연주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곡 자체가 좋아서 다른 사람도 그 곡을 시작했다는 걸 당연히 안다. 내가 뿌듯했던 이유는 곡을 고르는 취향이나 듣는 귀를 인정받은 것 같아서였다.


  마찬가지로 연습실에서 여러 번 12월을 연습하는 걸 듣고, 혹은 학원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연주 영상을 보고 누군가는 이 곡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았는데... 내가 이 곡을 완성한 이후로는 소머즈처럼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옆 연습실의 소리를 훔쳐 들어도 우리 학원에서 이 곡이 들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의 인기 멤버가 어느 순간 바뀌는 때도 있고, 또 입덕은 회전문이라 인기 멤버로 입덕 했어도 다른 멤버의 매력에 빠져 최애를 바꾸는 경우도 있으니 언젠가는 12월의 매력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나타나지 않을까?


연습의 흔적이 남아있는 12월 악보



* 연습기간: 2020년 11월 15일 ~ 2021년 3월 7일

* 참고 및 인용: 석사논문 <차이코프스키 사계 감상지도 방안>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배찬희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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