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니크 Jan 12. 2022

대학원에서 아이돌 덕질로 과제한 ssul.

그야말로 삼업일체. 2019년 나는 회사원, 대학원생, 그리고 아이돌 그룹 뉴이스트의 3년차 팬으로서의 자아가 내 몸과 마음 속에서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 대학원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바빴지만 중간고사를 앞두고 어(린 오)빠들의 콘서트를 3일 내내 다녀오는 등 '덕후 업무'로도 정신없었던,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정신 빠져있는 상태였다.

회사 직원 연수보다 길었던 어빠들의 콘서트 올출석

나는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한 나이부터 꾸준히 무언가를 덕질해 온 덕후였는데, 직장인의 덕질은 어쩔 수 없이 먹고사니즘과 깊게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내 본업은 홍보와 마케팅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었어서, 소속사의 위기 대처 능력을 보며 왜 저런식으로 대응을 하냐며 의아해하고 굿즈를 보며 상품 기획력이 이것 밖에 안되냐며 한탄도 했었다.


바쁘고 바쁜 현대사회인으로서 나는 회사 본업과 학업과 덕업을 적절히 (사실은 안간힘을 쓰며) 밸런스를 맞추며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 때 듣던 전공 수업에서는 시험 대체로 TV 광고 중 하나를 골라 분석하는 과제를 해야 했다. 동기나 선후배들은 광고제 상을 받거나 마케터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광고를 골랐지만 나의 선택은 달랐다. 덕후들 외에는 TV에 광고가 나오면 보는 사람마다 '쟤네가 누구야? 아이돌?'하고 궁금해할법한, 어빠들이 찍은 광고를 분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 전공 수업을 듣기 1년 전, 뉴이스트는 워너원 멤버인 민현을 제외하고 뉴이스트W라는 유닛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말이 되자 같은 소속사의 인기 아이돌 세븐틴과 함께 네네치킨 광고를 찍었는데 광고주는 뉴이스트W 캘린더를 만들어 특정 메뉴를 주문하면 캘린더를 증정하고 있었다. 덕분에 30대 중반에 "캘린더 있어요"를 물어보며 치킨을 시키는 수치플을 경험하기도 했다.



세상에 좋은 광고는 많았지만 사실 나는 TV 광고를 많이 보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 TV를 거의 보지 않고 OTT 플랫폼이나 유튜브로 콘텐츠를 즐기기도 하고, 정확하게 내 본업은 '디지털' 홍보 마케팅이라서 광고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로서 만들어져 재미나 감동을 주는 그런 디지털 광고를 좋아하기도해서 이래저래 광고 선정부터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꼭 유명한 광고를 선택할 필요는 없으며, 광고주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광고가 어떤 식으로 해결했는지 아쉬운 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잘 적으라던 그 말씀. 그게 무슨 EBS 강의만 듣고 수능보는 얘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광고주와 광고 모델에 대해서 잘 아는 광고는 무엇일까? 최근 가장 열정적으로 소식을 듣고 구매 활동을 펼친 건 바로 덕질 아닌가. 나는 대학원 과제에도 덕질로 경험한 것들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치킨을 자주 먹기는 하지만 어떤 브랜드가 업계 1위인지 시장 상황은 어떤지까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과제를 하며 어빠들의 광고주는 이 광고를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 마지 치킨회사 사장님이 된 것 마냥 열심히 고민에 빠졌다.


사실 어빠들이 찍은 TV광고는 15, 30 남짓한 짧은 영상이다. TV 송출될 때는 내가 좋아하는 멤버는 0.1초만에 화면에서 지나가기 광고를  때마다 어빠들이 성장해 광고를 찍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좋아서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유튜브로 다시 감기 하듯이 여러  꼼꼼하게 돌려봤다.


놀랍게도 광고제에서 상을 탄 유명한 광고들을 볼 때면 '아 좋다' 끝. 이게 다였다면 어빠들의 커리어가 달린 광고는 다르게 다가왔다. 이 광고는 치킨회사 사장님의 문제를 잘 해결했을까? 나야 어빠들이 광고 찍어서 좋았지만 사장님은 광고 모델을 적절하게 선정한 게 맞을까? 같은 광고 모델로 다른 크리에이티브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어빠들이 광고 모델을 할 수 있었는지 그 동안 덕업을 하며 쌓아온 K-POP 아이돌 팬덤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분석하고, 다른 아이돌 그룹들이 찍은 광고 중 좋았던 광고들을 떠올려 더 나은 크리에이티브를 위한 레퍼런스를 제시했다. 할 말이 계속해서 나왔다. 위에서도 썼듯이 교수님이 꼭 유명한 광고가 아니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던 이유 중 하나는 좋은 점 보다 '아쉬운 점'에 있었다. 마치 '까빠'가 된 것 같아 좀 미안했지만 그래도 어빠들을 까는게 아니라 광고에 대한 분석을 하는 것이고 교수님과 나 둘만 보게될 내용이니 자유롭게 썼던 것 같다.




과제를 제출한 다음 수업에서 만난 동기들에게 어떤 광고를 선정했냐고 물어봤을 떄 어디선가 들어본 광고들의 이름이 이어져 나왔다. 아마 이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 중 내가 선정한 광고를 분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교수님도 얘가 굳이 왜 이 광고를 선정했는지 의아했을 것 같기도 하다.


기말 과제 제출 후 이어지는 수업에서는 교수님께서 과제를 잘한 수강생에게 발표를 시켰는데 그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걸 보고 역시 유명하고 잘된 광고를 선정했어야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학기가 끝나고 보니 생각보다 잘 나온 학점에 놀랐었다. 뭐가 됐든 열정을 쏟아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도움이 되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거창한 것보다 내가 잘 아는 사소한 것이 때로는 중요한 게 아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