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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Jan 17. 2022

모바일 게임이 30대 유저를 박물관에 보내는 방법

바람의 나라: 연 X 국립민속박물관 <호랑이 나라> 컬래버레이션

스페셜 쿠폰을 겟챠

태어나서 해본 게임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게임 플레이를 잘 못하기도 하고 못하니까 안 하다 보니 더 못하게 돼서 아예 안 하게 된 지 오래다. 일 년 이상 해본 게임은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넥슨의 <바람의 나라:연>이다.


<바람의 나라: 연>은 넥슨의 장수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 IP(지적재산권)로 만든 모바일 MMORPG 게임이다. 쉽게 설명하면 여러 명의 유저가 게임에 동시 접속해 하나의 역할(role)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바람의 나라: 연>을 예로 들면, 유저들은 5개 직업 중 하나를 선택해 다른 유저들과 그룹을 꾸려 몬스터를 사냥하고 경험치를 획득해 레벨업을 하며 게임 내 콘텐츠를 즐긴다.


예상했겠지만 나는 원래 <바람의 나라> 유저였다. 중학생 때 동생이 하는 게임을 보고 재밌어 보여서 시작했다가 과몰입하는 바람에 성적이 심하게 떨어져 반강제적으로 게임을 그만두게 됐다. TMI지만 한 달 남짓 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반 수다 반 커뮤니티성이 강한 게임 특성상 나에게도 동갑내기 '겜친'이 있었다. 게임을 그만둔 뒤로는 메일을 주고받다가 어느 날은 같이 월드컵 응원을 하려고 만난 적이 있는데 엄청 훈훈한 남자애가 나와서 마음이 설렜더랬다.


이런 추억이 있는지라 나는 <바람의 나라>가 모바일 게임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게임 출시일 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처음에는 시간 날 때만 가끔 할 생각이었는데 요즘 모바일 MMORPG 게임 트렌드는 그게 아니란다. 하루 종일 접속을 해서 다른 유저들과 레벨을 얼추 맞춰야 콘텐츠를 즐기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마치 기약 없는 수능 시험을 준비하듯 나의 풀접속 게임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넥슨에서는 종종 다른 기업이나 사회복지단체와 함께 아이템을 팔거나 캠페인을 펼치는 등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다. 그런데 얼마 전 임인년 호랑이 해를 맞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진행하는 전시회 <호랑이 나라>를 보면 게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이버 지도 앱을 켜서 박물관 위치를 찾아보니 집에서 많이 멀지 않았다. 전시회도 무료고 하니 한번 다녀와보기로 마음먹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어른이 되는 나이가 점점 높아진 건지 아니면 원래 사람이란 평생 철이 들지 않는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게임에 과몰입한 어른들이 꽤 많았나 보다. 코로나 시국에 쿠폰 하나 받겠다고 박물관에 길게 줄을 선 겜른이들을 보며 게임사는 곧 쿠폰 배부 방식을 바꾸었다. (아마 대부분 20대 후반~30대일 게임 유저들이 이 정도로 게임에 진심인지 미처 예상치 못했다... 고 하기엔 현질 수준이 이미...)


사전에 관람을 원하는 일자를 네이버 폼으로 신청 후, 해당 일자에 신분증을 지참하여 확인 후 쿠폰을 주겠다는 말은 날벼락같았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람이라고 하지만 너무나 작은 마음을 가진 나는 주민등록증에 적힌 생년월일을 보며 개한심하게 쳐다볼 게임사 직원 앞에서 수치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쿠폰은 내 캐릭터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외형 아이템에 경험치를 20%나 올려주는 버프 효과까지 주니, 회사를 다니더라도 반차를 내고 갈 판인데 백수인 지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전시회 관람일이 되었다. 나는 너무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면서 최대한 직업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국립민속박물관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닌데 국립민속박물관을 가는 건 처음이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가지 않았던 박물관을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드디어 가는데 그 이유가 게임 때문이라니. <바람의 나라: 연>이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한 게임이긴 하다. 사회복지단체와 함께 한 '실종아동찾기' 캠페인 때도 느꼈지만, 게임 유저들의 화력을 선한 영향력으로 바꿔주는 이런 종류의 프로모션은 여러모로 좋다.


게임사와 프로모션을 할 정도면 큰 규모의 전시회일 거라 예상했는데, 전시회 자체는 아주 작은 규모였다. 많이 걷게 될 테니 운동화를 신고 온 게 머쓱해질 정도였다. 평소 같았음 3초 만에 지나칠 작은 설명글까지 다 봤는데도 관람을 마치기까지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주민등록증과 사전 신청 명단을 대조하는 머쓱타임까지 무사히 마치고 쿠폰을 손에 넣었다. (생각해보니 게임사에서 관람자 명단을 개별 발표가 아니라 엑셀을 그대로 갖다 붙인 듯한 공개 웹 페이지에서 해서 랜선 수치사를 했었더랬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집에 가려니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박물관의 메인 전시를 보기로 했다. 메인 전시는 '역병'이라는 주제로 과거부터 현재 코로나 시국까지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어떻게 역병을 극복하고 이겨냈는지 그 역사를 담았다. 생각보다 유익하고 재밌어서 차라리 이 전시회랑 컬래버레이션을 하지 싶었다. 겜른이들이 이왕 게임 세계에서 벗어나 콧바람 쐬러 나온 김에 이것도 보고 갔으면 좀 좋냐며 아쉬움을 뒤로한 채 평일 낮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한 <블루 보틀>에서 처음으로 커피 한 잔 때려 넣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처음보다 유저가 많이 줄긴 했지만, <바람의 나라: 연>은 여전히 유저들에게 사랑받는 게임이다. 맨날 말로는 '망겜이다', '다 태성이(게임 디렉터 이름) 잘못이다' 난리 부르스를 떨어도, 많은 돈을 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이만한 게임이 없다는 건 유저 대부분이 알고 있을 거다. 아마 나처럼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에 마음에 '러브 마크'가 새겨져 그냥 해야 되니까 하는 것처럼 게임을 하는 유저들도 있을 수 있다. (작년 여름, <바람의 나라: 연>이 출시 1주년을 맞아 이벤트를 진행했을 때 나처럼 추억팔이를 하는 수많은 유저들을 보고야 말았네?...ㅎ )


내가 나이가 몇인데 고작 게임 때문에 이런 것 까지 해야 되나 싶었지만 날씨가 춥다고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밖으로, 그것도 박물관으로 나들이를 한 게 나쁘지 않았다. 이번 전시회 관람을 하면서 왜 모든 기업들이 당장은 돈이 되지 않는 나이 어린 세대를 사로잡으려고 마케팅을 하는지, 그 결과가 훗날 어떤 효과로 나타나는지, 강력한 팬덤이 생기면 고래도 왁킹을 추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혹시 넥슨 관계자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섭종하지 말고 오래오래 갓겜 만들어주세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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