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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베이지 Sep 02. 2017

월간 박베이지 에세이 -9월

옷을 가볍게 걸치기 좋은 날씨.



1. 

옷을 가볍게 걸치기 좋은 날씨. 

식상하게 느껴지는 이 관용어구를 눈을 감고 그려보면 어디선가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살랑인다. 

다시 한 번 소리내 발음해 본다.
옷을 가볍게 걸치기 좋은 날씨. 









2.

그러니까, 반팔차림은 조금 썰렁하고 캐시미어 가디건은 어딘가 후덥하다. 이런 저녁엔 편의점 앞 빨간색 플라스틱 테이블에 둘러앉아 싸구려 맥주를 마시곤 했다. 나는 지렛대의 원리는 물론이고 각운동량과 토크 값에도 능통하지만, 정작 숟가락으로 맥주 뚜껑 하나 따질 못하기 때문에 우린 주로 카프리를 샀었다. 

카프리라는 병맥주는 말이지, 병뚜껑을 손으로 돌려 손쉽게 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볍게 마시기에 맛도 좋다. 

실은 난 맥주 맛 따위는 잘 몰라. 다만 맥주를 마시곤 했던 그날의 습기라던가, 맥주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좋았다. 그 맥주가 크래프트 비어는 못되고 맛 좋다는 에일 맥주도 아니었지만 말이야. 어느 여름 밤, 아무말로 대잔치를 하면 우리 사이에 맥주가 카프리가 됐든 아버지가 홀로 드시던 하이트 맥주가 됐든, 이미 충분했었다. 

이젠 좋다는 데서 값비싼 술을 언더-록 잔에다 멋지게 따라 마셔도 어딘가 어색한 웃음은 어쩔 수 없다. 아무말로 폭죽을 올리고 깔깔댈 수 있었던 그 땐 카프리 하나에도 이렇게 즐거운 세상이면 나중엔 얼마나 더 좋은 세상이 기다린다는 건지, 좀처럼 벅차기만 했었다. 


아마도 맥주 한 병에 취했었던 것이다. 혹은 내가 가만히 바라보기엔 너무 찬란했거나. 
나는 바로 눈 앞에 화양연화를 두고도 눈을 감고 미래를 그렸다.






3.

여튼 이런 날에는 강아지랑 짚 앞 공원을 한바퀴 돌아도 좋고, 다이어트를 맘 먹은 친구와 초등학교 운동장을 두어바퀴 달려도 좋겠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는 부모님 말을 어지간히 듣지 않았고 친구들도 그런 편이었기에 우린 해가 지고서도 운동장에 모여 불장난 비슷한 걸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저기 운동장 구석진 곳에 도저히 형은 아닌데, 그렇다고 아저씨는 또 아닌 청년 헛둘이 우리를 넋 나간듯 들여다보는 게 느껴졌다. 뭐야. 바보같이.


어느덧 시간은 지나고 이젠 우리가 이 운동장에 서 있다. 이런 사람들이었구나. 사실 마음 속에선 아직도 교장 선생님이 훈화 말씀을 하시고, 여전히 만화영화는 재밌고, 주말의 늦잠은 좋은데 더 이상 세상은 우릴 보고 괜찮다고 얘기해주질 않는다. 


운동장 구석진 어딘가에서 저기 농구공을 만지작대는 핏덩이들을 본다. 아저씨들은 누구신데 그렇게 넋이 빠져 너희들을 보느냐고? 믿기 힘들겠지만 우린 미래의 너희야. 너무 심한 말이라니. 그 말이 더 심하다 얘. 


우리는 너희에게, 동시에 지난 날의 우리 스스로에게, 전해지지 않을 말을 전했다.



언젠가 여기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돌고 돌아 너희가 이 자리에 섰을 때, 반복될 그 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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