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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쨍무 Jun 16. 2024

ep.1 |감자칩을 먹는 두 연인


ep.1 |Calle de Finlandia 감자칩을 먹는 두 연인


청각 재료를 모으기 시작한 건 스페인 여행에서였다. 지난겨울, 나와 동행인은 세비야로 향하는 기차 안이었다. 여행 중반이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조용한 건 오로지 우리뿐이었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호탕하게 웃거나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각선에 앉은 어린아이는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고 뒷자리 청년들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이라면 기차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간식을 먹는 것도 왠지 눈치가 보였는데 이곳은 달랐다. 누구도 눈치 보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누구도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만 이방인답게 어리둥절한 채 서로를 힐끔거렸다. 우리를 제외하고 모두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만 한 글자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또한 이상한 소외와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나와 동행인 중 한 사람-누구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이 약간의 용기를 낸 듯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과자 먹을까? 우리는 조용히 감자칩을 우적우적 씹었다. 바삭한 식감이 소음을 만들었지만 또 다른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낯선 공간에서의 체험을, 소리에 의한 체험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어째서 사진이나 동영상이 아닌 음성 메모가 떠올랐는지 몰라도 자연스럽게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1분간 녹음을 했다.


아이폰에서 음성 메모를 하면 현재 위치가 제목으로 저장이 된다. Calle de Finlandia. 문제는 스페인의 지명을 잘 모르기에 오류가 있더라도 알 방법이 없다는 것. 하지만 과연 그게 문제일까?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감자칩을 먹는 두 연인. 음성 파일을 재생하자 여러 소리들이 겹겹이 들린다. 감자칩을 입에 넣고 입을 다물고 우물거리는 소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난다. 그 뒤로 웅웅 기차 소리,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남성의 목소리, 맞장구치는 여성 목소리. 감자칩 봉지에 손을 넣는 소리. 어느 것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생하는, 소리와 소리들.


이때 내가 느낀 것은 저장에 가까웠다. 사진 혹은 동영상과 다르게 뭔가를 수집한 것 같았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이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단지 방식만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훨씬 생경한 기록으로 느껴졌다. 쉽게 말해 여행의 장면을 직접 수확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소리만으로.


그러니 여행지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마음껏 찍는 만큼, 그 반의 반만큼은 소리를 저장해야겠다고. 이런 기록도 꽤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부터 우리는 분주했다. 한참 전부터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악명 높은 소매치기를 방지하고자 캐리어를 기둥에 묶어놨기 때문이다. 분주하게 내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준비를 해놔야 했다.


Ciudad Real 호텔 가는 택시


택시 안은 고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호텔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20분 정도였다. 동행인과 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고 굳이 떠들지는 않았다. 여기서도 45초 정도 녹음을 했다.


라디오에서 두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빠르게 발음되는 스페인어. 아마도 내가 움직이느라 옷자락이 내는 소음. 바깥에서 다른 차가 크게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녹음되었다. 라디오에서는 한 남자를 향해 남은 두 사람이 같은 말을 서둘러 내뱉는다. 공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야유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호텔 입구에 도착했고 녹음은 종료가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소리를 녹음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지의 풍경은 너무나 손쉽게 시선을 빼앗았다. 아름답고 황홀한 풍경은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꺼내게 만들었다. 인간이 만들었을 거라 짐작하기도 어려운 가우디 건축물 앞에서는 계속해서 고개를 들게 됐다. 관광지에서는 몸이 저절로 움직이며 반응하니까. 누구나 넋을 놓은 채 손에 쥔 핸드폰을, 무거운 카메라를, 캠코더를 꺼냈다.


이러한 행동들은 이제 우리에게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시선을 포기하고 시각적인 기록을 포기하면서 소리만 담는 것은 익숙한가? 한눈에 우리를 사로잡는 예술 작품 앞에서, 비둘기 나는 소리나 감탄하는 관광객들 소리를 담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그렇지 않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그것은 어색하다.


내 음성 메모함에 담긴 청각 기록들은 대부분이 소음에 가깝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소리, 차 안에서 소리, 호숫가 새 소리, 브런치 가게의 소란스러움. 전부 별 볼 일 없는 소리들이다. 내가 스페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친구에게 내가 모은 소리들을 보여줬을 때 친구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친구는 우선 나를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아주 잠깐 고민하다 물었다.


그래서 이 소리가 어디에 쓰여?


나로서도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글쎄. 듣고 싶을 때 듣기?


사실 유럽이 처음인 나에게는 스페인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어색한 것 천지였다. 이왕 어색한 장소에서, 공간에서, 거리에서 어색한 방식으로 순간을 기록하자는 것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언젠가 스페인 여행을 떠올리면 감탄했던 풍경들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날 것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곳을 지키고 있을 카사 바트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스페인 광장. 그것들은 모조리 머릿 속에서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되었다. 그러나 삭제해도 전혀 모를, 있으나 마나한 순간도 나에게는 중요했다. 내가 스페인에 다녀와서 느낀 것은 바로 그거였으니까.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을 나는 주머니 속에 넣듯이 저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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