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변호사 Jun 30. 2019

사건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2

교통사고 사건을 보며 죽음을, 악성 댓글 사건을 보며 가족을 생각하다

우리가 살면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늘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일을 처리하고 무엇을 어떻게 먹고살지 고민하기에 급급한 바쁜 일상 속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은 지인이나 유명인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을 때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로 일하면서 형사사건을 다루다 보면 종종 죽음을 접하는 경우가 있다.

교통사고 사건을 보며 죽음을 생각하다


그중 일례로 교통사고 사건을 다룰 때 교통사고를 발생시킨 가해자 측 변호인이 되기도 하고 피해자 측의 대리인이 되기도 한다. 보통 교통사고 사건 특히나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의 경우는 가해자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해자 측 변호인은 피해자 가족에게 선처를 구하고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하게 되며, 종종 피해자 측에서도 운전상의 잘못을 범한 과실이 있을 경우 이러한 과실을 논하는 경우가 있다.



가해자 측 형사 변호나 민사 소송대리를 맡았을 경우 피해자 또한 운전을 하며 신호를 무시했다거나 중앙선을 침범하려 했다는 등 과실이 있음을 주장하고 입증하게 된다. 때로는 피해자 가족을 대리하여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건을 진행할 경우에는 보험회사까지 엮여서 보험금을 수령하였는지 혹은 이 경우 이미 수령한 보험금 때문에 별도의 손해배상 청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를 검토하게 된다.



이렇게 또다시 돈문제를 놓고 사건 기록을 분석하고 증거를 분석하며 서면을 써내려 가다 보면 문득 타자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종종 기록을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해 죽은 피해자는 사건 발생 직전까지 건강하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생활하고 있었다거나 원하던 회사에 취직해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거나 하는 경우들이 있다.



단순히 얼마의 돈을 배상받고 얼마의 돈을 지급하고 피해자에게도 과실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과연 이 피해자는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에 자신의 앞에 닥쳐올 일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전혀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닥쳐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민사든 형사든 사건을 떠나 잠시 피해자에 대한 생각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생각은 꼬리를 이어서 한 치 앞을 모르는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솔직히 이는 유쾌한 생각은 아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면 금세 우울해지며 두려움까지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 또한 죽음이라는 주제를 언급하고 다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죽음 특히나 가족의 죽음을 주제로 하는 영화는 일부러 보지 않고 피할 정도로 굳이 무거운 주제를 내 삶에 끌어드려 내 기분을 다운시킬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사건을 통해 죽음을 접할 때마다 한번 즈음 나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 즈음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생의 끝을 맞이할 수 있다. 그 시기와 방법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없고 이는 신의 영역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언제가 끝일지 모르는 우리네 삶에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 그렇게 집착하며 싸우고 다투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기독교에서는 생을 다 하는 순간 우리의 육신과 재물 모든 것을 두고 영혼만이 신 앞에 서게 된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공수래공수거'라고 하여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간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많은 종교들은 사람들이 이 생에서 다투고 경쟁하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지만 결국은 마지막 순간에 모두 놓고 가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생각을 하다 보면 자칫 허무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경쟁하고 돈을 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너무 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 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끝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면 이를 전전긍긍하며 매 순간 불안해하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조금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어떤 삶이었든 어떤 의미로든 안타까운 일은 맞다. 하지만 이를 걱정하며 살기보다는 지금 오늘 하루가 나에게 주어졌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 끝이 언제이든 삶이 좀 더 풍성하게 채워지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삶도 언젠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끝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본다면 좀 더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 있는 자세로 삶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는 물론 나에게 소중한 이들에게 더욱 감사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악성 댓글 사건을 보며 가족을 생각하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상에 타인을 비방하는 내용을 게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당연히 악성 댓글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또한 늘어났으며, 이전에는 단순히 무시하거나 경고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었다면 언젠가부터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법적 대응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악성 댓글들을 찾아 모욕죄로 고소대리를 할 때에는 악성 댓글 하나하나를 일일이 읽고 범죄 일람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신박한 욕들을 하나하나 배워갈 때의 그 스트레스란.


몇십 개의 고소장을 쓰고 나면 단시간에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은 스파르타 속성으로 마스터하게 된다. 한 번은 고소장의 범죄 일람표에 욕설이 가득 담긴 욕을 옮겨 적다가 구토가 올라오며 울면서 사무실을 뛰쳐나간 적도 있다. 몇 날 며칠을 범죄 일람표를 채우다 보니 이제는 꿈속에서도 욕설들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사무실을 뛰쳐나가 클래식 음악이나 ccm을 들으며 바람을 쐬어도 좀처럼 머릿속이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악성 댓글은 나쁩니다 여러분. 모욕죄로 고소를 당할 수 있으니 절대 타인을 비방하는 글은 쓰지 마시고 키보드워리어가 되지 마십시오. 이 고소대리인은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당을 찾아낼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하고 싶네요.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 캐치 미 이프 유 캔 하지 맙시다 우리.).



고소인이 오랜 기간 악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무시하다가 왜 이제와 서야 강력 대응을 하겠다고 했을까. 댓글에서 욕설을 하는 정도가 그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단순히 이렇게만 생각했지만 고소인을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단지 욕설과 비방이라는 차원을 넘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듣게 되었다. 고소인들은


"나에 대한 욕이라면 하루 이틀도 아니니 참아 넘길 수 있어요. 그런데 나에 대한 욕을 우리 부모님이 보시고 상처를 받으시는 것은 참을 수 없었어요. 게다가 우리 가족을 욕하기 시작하는 순간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단순히 욕설과 비방만 난무한다고 생각했던 악성 댓글 모욕죄 고소 사건을 통해 나는 '가족'을 보게 된 것이다. 나에 대한 비방은 참을 수 있다. 나는 내 선택에 의해 대중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욕설 또한 나의 선택에 따른 결과로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이 더 이상 참아 넘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결정적인 근거는 '나의 가족'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것을 참아 넘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가족이 무엇이길래 이 심한 욕을 듣고도 웃어넘기던 사람이 '선처는 없다'며 강력한 대응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그 앞에서 단순히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심하게 화가 나서 이제는 제대로 받아치려나보다 라던 내 짧은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내게도 만들고 분노하게도 만드는 것일까. 한참을 모니터 앞에 앉아 분노로 두드리며 옮겨 적던 범죄 일람표를 멍하니 바라보며 가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의 힘을 내도록 만들어주는 존재인 것 같다. 어쩌면 그 의뢰인이 지금의 자리까지 갈 수 있도록 힘을 내게 해 준 원동력도 가족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어쩌면 나 또한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내 가족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이렇게 나는 기록을 보며 인생을 배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