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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계속 걸어가기를

by 조일연

미움을 받는 일에 익숙하다. 나름 경력직인 셈. 이 말을 이렇게 담담하게 할 수 있기까지는 중고등학교를 지나 사회에 나와서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여중 여고를 졸업했던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괴롭힘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왕따라고 쓰기도 애매한 것이 지금의 나처럼 그때의 나도 대체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고 괴롭히는 애들이 있는 것 치고는 신기하게도 늘 반장을 했으니 왕따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 하지만 거리 두기를 넘어 괴롭힘의 단계로 넘어가자 이제는 문제가 달라졌다. 화장실에 다녀오면 교과서가 찢겨 있고, 체육시간을 마치고 들어오면 필통이 변기에 박혀있고, 하교를 하려고 신발장에 가보면 운동화가 사라져 있어 실내화를 신고 집에 오는 날이 많았다.


그때부터 나도 정상은 아니었던 것이 지금 기억하기로도 무섭다거나 속상하다는 느낌은 기억이 나지 않고 그저 귀찮았다. 그리고 운동화를 또 사주셔야 하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 정도. 앞에서 너무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멱살을 잡아주라는 엄마의 말에 정말로 멱살을 잡아 들었더니 그 뒤로는 괴롭힘이 줄어드는 대신에 혼자인 시간이 늘어난 것만 보더라도 평범하지는 않았구나 싶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매사에 칼같이 규칙을 지키고, 대체로 혼자 공상에 빠져 책을 보고 있고, 시끄럽게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꽤나 꼴 보기 싫었을 수도 있겠지.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공부를 잘했다. 그러니 속으로야 내가 미워 죽겠을지 몰라도 겉으로 괴롭힐 수 있는 아이들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커피를 국그릇에 담아 사발로 마시면서 공부를 하고는 시험에서 백점을 받으면 엄마가 선생님에게 촌지를 주고 시험문제를 미리 빼돌린 거라고 뒷담화가 돌았다. 그때 우리 집은 아빠의 사업이 망해 급식비와 우유값을 간신히 내고 있었으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선생님에게 찔러 넣을 돈이 있는 사람처럼 보인 걸 보니 가난해 보이지는 않나 보다 싶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다들 뒤에서만 수군댈 뿐 면전에서 괴롭힐 수 있는 아이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때부터였다. 공부를 잘해야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계속하자고 마음먹은 건.


재수생 시절. 학원에 갈 돈이 없어서 강북문화정보센터 도서관을 다니며 혼자 공부를 했다. 재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이 온 친구가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공부를 하고 식사시간에 만나 같이 밥을 먹곤 했다. 한 시가 아까워 밥만 먹고 얼른 들어가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친구는 세월아 네월아 두 시간 가까이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있으니 자꾸만 불안하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6월 모의고사를 본 날. 성적이 바닥까지 떨어진 점수를 받아 들고 망했구나 싶은 마음에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못해 활화산 용암 정도가 떨어진 후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지금 내 성적을 보니 도저히 식사시간에 시간을 더 할애할 수가 없어 따로 밥을 먹어야 할 것 같다고. 나는 그때까지도 이게 그렇게 미움을 받을 일인지 몰랐다. 그렇게 따로 밥을 먹기 시작한 지 몇 주 후 강북문화정보센터 3층 복도에서 그 아이가 나를 보며 "야 이 씨발년아! 너만 공부하냐 씨발!"이라고 목청 높여 외치기 전까지는. 덕분에 나는 도서관에도 가지 못하고 그다음 날부터 집에서 내 방에 박혀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거의 수개월을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수능 한 달 전 내 핸드폰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장문의 욕을 보내기까지도 그 아이의 분은 풀리지 않았나 보다. 끝내 함께 공부를 하던 나의 더 오래된 다른 친구와 나의 사이까지 이간질해 결국 나는 그렇게 몇 달을 방에 갇혀 공부를 하는 선택을 했다. 그 오래된 친구는 거의 10년이 지나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내가 방 안에 갇히기로 선택한 후 나에게 욕을 했던 아이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이간질이라는 걸 알게 되어 뒤늦게 나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고.


수능 한 달 전 그 아이가 보내온 장문의 문자메시지 내용은 대략 이랬다. 네가 그렇게 혼자 공부한다고 해버리면 자신은 노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공부가 안 되는 줄 아느냐며. 자신이 시험을 망치면 내 탓이라고 하더니 나에게 너는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라면 커서 몸이라도 팔 애라고 했다. 열아홉 살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 그저 멍 했지만 그 문자를 받아 든 아빠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며 대단히 심한 말이구나라고 느꼈다. 당장 그 집으로 찾아가겠다는 아빠를 말리고 나는 그 아이가 보낸 문자를 사진으로 찍어 프린터로 출력한 후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내가 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데 기왕 하는 거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날부터 화장실에 가는 시간, 손톱을 깎는 시간, 밥 먹는 시간까지 초를 재며 공부를 했고 밥 먹는 시간을 아끼려고 몇 달을 반찬을 잘게 자른 비빔밥만 먹었다. 그리고 결국 수능에서 몇 문제 밖에 틀리지 않는 성적을 받아 꿈꾸지도 못했던 학교에 입학을 했다. 욕을 듣더라도 멈추지 않고 계속 가면 된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대학에 와서는 잠시 주춤했지만 사회로 나온 후에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다. 특히 비슷한 그룹이나 큰 조직에 들어갈 때면 여지없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로펌에서 일하며 SNS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더니 일부 변호사들은 관종이라며 욕을 하고 근무했던 정부기관에서 부탁을 받아 법률강의를 하기 시작하니 네가 뭔데 강의를 하냐며 욕을 했다. 일을 하며 지칠 대로 지쳤던 나는 어릴 때의 패기를 잊고 주위의 평가가 두려워 모든 것을 멈췄다. SNS 계정은 새로 만들어 비공개로 돌리고, 유튜브 채널은 모든 영상을 지우고 채널을 폐쇄했다. 더 이상 강의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세상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몸을 낮추고 조용히 있으면 눈에 띄지 않아 나를 욕하는 사람도 줄어들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사람들로부터 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처럼 누군가를 욕하는 사람들을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 그 자리를 떠버리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내가 조용해진 만큼 누군가가 나의 욕을 한다더라는 이야기도 적게 들렸지만 돌아보니 누군가에게 욕먹는 것이 두려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멈추어버려 놓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로스쿨 생활과 변호사 생활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렇게 글로 풀어내는 것도, 강의를 하는 것도 모두 나의 기쁨이었건만. 결국 욕먹는 것이 두려워 모든 걸 멈춘 나만 남고 내가 좋아하던 일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야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나를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해야 하는 건 계속하는 거였다. 계속 가는 일. 아무리 나를 미워하는 이들의 날 선 말이 들려도 그냥 계속 걷는 일. 대체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욕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아있기 마련이어서 그저 내가 묵묵히 앞으로 계속 나아가면 언젠가는 그 소리가 작고 희미해져 귀에 들리지 않게 될 텐데.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멈춰서는 그 무엇도 될 수 없고 어디에도 갈 수 없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 사람들의 안에 있는 어떤 결핍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가만히 지켜보게 된다. 이 마음을 가지게 된 건 역설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해보고 난 후였다. 굳이 찾자면 이유야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을 미워할 일이 아닌데 미움이 올라왔던 때가 있다. 자신을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란 고명딸이라고 말하는 그녀가, 집에 돈이 많아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아왔다는 그녀가, 아버지가 키가 크고 풍채가 좋아 건강한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그녀가 부러웠다. 세상에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이 자란 것 같아 다른 사람들도 보면서 '귀하게 자란 티가 나네. 부티가 나'라고 말하는 그녀가 나는 부러웠던 거다. 그래서 식사 자리에서 수저를 알아서 깔아 놓지 않고, 누군가 챙겨주기만을 기다리고 앉아 누군가 자신에게 밥을 사주는 일이 너무 당연한 듯이 말하는 모습을 보며 이걸 구실 삼아 그녀를 미워했다. 사실 지지리도 어렵게 자란 내 가정환경이 부끄러워 고생 없이 자란 모습이 부러웠던 것이면서도.


누군가를 잔뜩 미워해보고 난 후에야 나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던 결핍이 내 안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로부터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건 나에게서만 기인한 것이기보다 미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달린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그제야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도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유태오 배우의 사고실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그가 한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아 인터뷰에서 들었던 말을 적어두었다. “인생을 맛있게 살자. 인생을 다 경험해 보고 오감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고 그 안에 고통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그 모든 것을 느끼고 그 느낌을 다 보태서 삶을 최대한으로 살자. 진짜 맛있게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한 입으로 확 베어 먹은 것 같은 삶 후회 없이 삶을 다 맛보았냐 그런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인터뷰를 보면서 나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을 적어보니 무언가 저지르고 시작해 본 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헤아려본 틈도 없이 멈춘 순간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누군가를 의식해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도전하고 즐기며 주어진 이 삶을 최대한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는 이 여행 끝나는 날, 허락해 주신 덕분에 신나게 놀다 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라건대 더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비난하고 욕하는 데 보낼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고 더 아름다운 것을 입에 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 나를 향한 누군가들의 이야기 앞에서 자꾸만 움츠러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 이야기를 꼭 전해주고 싶다. 온 사람이 온 말을 해도 결국은 멈추지 않은 채 계속해온 나만 남는다고. 그러니 주위의 날 선 말이 아무리 들려도 멈추지 말고 나의 길을 가자고, 내 길을 따라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자고, 결국 남는 건 내가 걸어온 길과 나 자신뿐이라고.


누군가로부터 어떤 비난을 듣더라도 자신이 결정한 길을 굴하지 말고 끝내 뚜벅뚜벅 걸어가기를 바란다. 주위의 소리가 더 희미해져 들리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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