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학연구회 공부모임
8월 27일, 생명학연구회 월례모임에 이어 생명학 공부모임에서는 '장기주의'에 대해 유정길 님의 발제와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장기주의란 <장래 아주 먼 미래까지 인류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도록 현재의 선택과 행동을 설계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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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선주민 이로쿼이 족에게는 ‘7세대 원칙(Seven Generation Principle)’이라는 오랜 지혜가 있다.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7세대 후의 후손들에게 미칠 영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하면 약 210년, 거의 두 세기 후의 미래까지 내다보며 현재의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전통이나 관습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실용적 지혜였다. (중략) 현대의 장기주의(Longtermism)는 바로 이 7세대 원칙의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이래 이제껏 살아온 인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세대는 수백억, 수조 명이 더 태어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만큼 중요하게 여겨야 하며, 지금 우리의 결정 효과가 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그래서 미래 세대의 복지를 현재 세대와 동등하게 고려하고, 수백 년 후의 결과까지 내다보며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철학이다.”(유정길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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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주의(長期主義, Long-termism)는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 년 뒤에 살게 될 인간과 다른 존재들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전제 위에 "지금 살아가는 세대만 고려하는 단기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따라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실존적 위험(Existential risk)’—핵전쟁, 기후 붕괴, 팬데믹, AI 통제 실패 등—을 줄이는 것이 핵심 과제입니다. 이른바 "인류세"가 가시화, 현실화하면서,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근대인의 사고가 '근시안적'인 "단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성찰이 깔려 있는 사조(思潮)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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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파핏(Derek Parfit, [Reasons and Persons(1984)], 토비 오드(Toby Ord, [The Precipice(2020)]을 거쳐 윌리엄 맥애스킬(William MacAskill, [What We Owe the Future(2022)]이 본격적으로 “장기주의” 개념을 정리하며,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장기주의의 관점은 “인류는 수천 년 이상 존속할 잠재력이 있으며, 미래 세대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류 수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내리는 결정은 수십억, 수조 명의 잠재적 존재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담대한 상상력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는 (미래) 인류(자신)의 존속을 위협하는 위험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최우선 과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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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주의는 “미래 세대 전체를 고려하는 윤리적 태도”이자, 인류의 장기적 번영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철학적·실천적 입장입니다. 장기주의는 철학적·윤리적 관점에서 아주 먼 미래 세대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류의 실존적 위험(Existential risks) ― 예를 들어 기후 붕괴, 핵전쟁, AI 통제 실패 등 인류 전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요소를 줄이는 데 관심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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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유사한 관념으로 “지속가능성” 개념이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은 주로 환경학·사회학·경제학에서 강조되며,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미래 세대의 필요를 해치지 않는 발전”을 의미합니다(브룬틀란드 보고서, 1987).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현재 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키면서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 환경, 경제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환경(Planet), 사회(People), 경제(Profit)의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는 것을 강조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개념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으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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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 개념은 “환경 보전, 자원 관리, 사회적 형평성, 경제적 안정성” 즉, 좀 더 정책적·실천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지금 내리는 선택이 수천 년 뒤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둔 장기주의와 유사하면서도 다릅니다.
두 개념 모두 “미래 세대”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미래지향적라고 할 수 있으며, 기후 위기, 생태 파괴, 인구 문제 같은 장기적 과제를 핵심 주제로 삼습니다.
이에 비해 지속가능성은 당장 수십 년에서 길어야 몇 세대 앞을 내다보며, 환경과 자원 관리 중심으로 실천 전략을 제시한다면 장기주의는 훨씬 더 원거리의 시간 규모(수백·수천 년 뒤)와 인류 전체의 존속을 주된 관심으로 둔다는 점은 차이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속가능성은 장기주의의 구체적 실행 전략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장기주의가 철학적·윤리적 큰 그림을 제공한다면, 지속가능성은 그 그림을 사회·정책적 차원에서 실천하는 방법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속가능성은 장기주의의 실천적 토대이고, 장기주의는 지속가능성의 철학적·윤리적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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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장기주의나 지속가능성 개념과 실천은 모두 ‘미래지향적’이지만, 그 미래는 곧 현재화된 미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기주의나 지속가능성 개념은 “(新)현재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舊)현재주의’는 ‘현재중심주의’로서 단기주의적 관점을 지칭한다면, ‘신-현재주의’는 현재가 미래에 대해서까지 책임이 있다는 ‘현재책임주의’이며, 미래를 위해서라도 현재의 삶에서 최선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는 ‘현재최선주의’라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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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장기주의는 “먼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현재”는 미래를 준비하는 결단의 시점입니다. 예를 들어, AI 안전 연구, 기후 변화 대응, 핵무기 통제와 같은 주제는 지금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때 현재는 단순한 순간이 아니라 미래 전체를 열어가는 문턱으로 이해됩니다.
지속가능성은 “현재의 필요를 충족하면서도 미래의 필요를 해치지 않는다”는 정의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사조에서의 현재는 자원의 사용과 분배, 사회제도의 운영이 실제로 일어나는 장입니다. 현재의 잘못된 소비나 착취가 미래를 해치기 때문에, 현재를 절제와 책임의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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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장기주의-지속가능성-신/현재주의의 관점을 고려하면서 동학을 보면 동학이야말로 장기주의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합니다. 동학은 ‘선천 오만년’과 ‘후천 오만년’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내 삶이 ‘후천 오만년’이라는 긴 시간 - 미래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다시개벽 / 후천개벽의 기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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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이 동학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종교가로서의 일생(동학 창도 ~ 순도)을 통틀어 결론적으로 노래한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 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노래한 ‘무궁’이란 곧 시간적 장기주의와 공간적 장기주의를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한울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장기주의’의 기반 위에서만 올바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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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무체법경> ‘성심변’에서 “운용의 맨 처음 기점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니 나의 기점은 성천의 기인한 바요, 성천의 근본은 천지가 갈리기 전에 시작하여 이때에 억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로부터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때에 억억만년이 또한 나에게 이르러 끝나는 것이니라.(運用最始起點曰我 我之起點 性天之所基因 性天之所根本始乎天地未判之前而是 時 億億萬年自我而始焉 自我至天地之無而是時億億萬年 亦至我而終焉)”라고 한 것 역시, 동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장기주의를 단순히 바라볼 문제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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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류세에 처하여 인류가 새롭게 재인식하는 세계의 본질은 “연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고립)하여 ‘인간문명’을 건설한 것처럼 생각해 온 것이 근대주의라면, 그 인간문명조차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한 것이라든지, 나와 너의 연결성, 인간과 비(非)인간의 연결성, 생명과 비(非)생명-사물의 연결성, 만물의 연결성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본연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임사호천(臨死呼天: 죽을 때가 되어 한울님을 부름)’처럼, 인류세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인류가 자기의 본질을 되돌아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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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결성의 재인식은 정확하게 동학의 “각자위심 하단말가 - 동귀일체 하여스라”의 개념쌍에 대응합니다.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게 된 문제의식과 대안적 인식이 바로 당대의 인간과 문명(서세동점으로 인식되던 서구문명까지)이 ‘각자위심’ 즉 존재의 연결성을 망각하고 그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세태를 우려하며, ‘동귀일체’ 즉 만물의 연결성을 자각(自覺)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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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연결성이 ‘공간적 연결성’만이 아니라 ‘시간적 연결성’을 염두에 둔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무궁’이 시간적 무궁과 공간적 무궁을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귀일체’의 궁극적 근거는 사람과 만물이 모두 한울님으로부터 유래한 ‘물오동포, 인오동포(物吾同胞 人吾同胞)’라는 것이고, 그 한울님의 속성인 ‘무궁’은 바로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 아니, 필연적으로 ‘우주(宇宙)’라는 말이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함의하고 있는 것과도 감응합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이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것’이라고 밝히는 것과도 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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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해월신사법설-삼경의 '경천(敬天)' 개념 중 "사람은 첫째로 敬天을 하지 아니치 못할지니, 이것이 先師의 創明하신 道法이라. 敬天의 原理를 모르는 사람은 眞理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하면 한울은 眞理의 衷을 잡은 것이므로써이다. 그러나 敬天은 결단코 虛空을 向하여 上帝를 恭敬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恭敬함이 곧 敬天의 道를 바르게 아는 길이니, 「吾心不敬이 卽 天地不敬이라」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敬天함으로써 自己의 永生을 알게 될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人吾同胞 物吾同胞의 全的理諦를 깨달을 것이요, 敬天함으로써 남을 爲하여 犧牲하는 마음, 世上을 爲하여 義務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敬天은 모든 眞理의 中樞를 把持함이니라."에서 '경천함으로써 자기의 영생을 알게 된다'는 것도 '경천'이라고 하는 행동적 개념, 그런 점에서 공간적 개념이 '영생'과 연결된 것도 공간적 연결성이 시간적 연결성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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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장기주의’의 사상적 연원을 아메리카 선주민(先住民-cf. 인디언)으로부터 찾는 것은 서구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기주의’는 전통적 사유방식(생활방식=존재방식)에는 공통적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적인 ‘장기주의’ 전통이 최종적으로 종합된 것이 동학의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장기주의는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나”를 위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수운은 “도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니니라.”(<후팔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밝음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멀리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不知明之所在 遠不求而修我).” “덕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 몸의 화해난 것을 헤아리라(不知德之所在 料吾身之化生).” “명(命)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 마음의 밝고 밝음을 돌아보라(不知命之所在 顧吾心之明明).” “도(道)가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내 믿음이 한결같은가 헤아리라(不知道之所在 度吾信之一如).”(이상 <전팔절>)라고 한 것도 함께 생각해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