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하 Dec 17. 2015

브레게 스타일 (41)

Epilog

눈도 내리지 않는 유난히 춥기만 한 밤이었다. 출입기자 송년 모임을 비롯해서 종무식과 시무식 준비로 바빴던 신재이는 그 날도 자정을 넘겨 귀가했다. 본새 잘 취하지 않았지만 또 술을 과하게 마시지도 않았다. 적당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적당한 시간에 빠져나온 그가 현관을 열고 들어오니 동희는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웅크린 자세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서둘러 옷을 벗어 다용도실에 내걸었다.

집이 조용한 것을 보니 아이는 잠든 모양이었다. 얼른 몸을 닦고 나오자 그녀는 방에 들어가고 없었다. 아이가 자는 틈에 안아보려 했더니 오늘도 허탕인가 싶어 뒷목을 긁적이다 전등을 끄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기와 같이 이불을 덮고 잠든 동희 곁에 누워 다른 이불을 덮으니 성욕이 일었던 것도 까마득하게 재이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가 칭얼대는 소리에 동희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가 채 안 되었다. 멍한 정신으로 아이를 안고 앉아 젖을 물렸다. 40분 동안 수유를 마치고 아기를 세워 안아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잠든 아기를 다시 이부자리에 내려놓은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무기력한 느낌이 들고 허무하기까지 하였으나 이유를 뚜렷이 알지 못했다. 갑자기 잠든 줄 알았던 은행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울기 시작했다. 동희는 아기의 기저귀를 확인했다. 아직 보송했다. 

"아직 배가 고프니? 더 먹자." 그녀는 다시 아기를 안고 앞섶을 풀었다. 그러나 은행이는 그마저도 좀 빨다가 다시 크엥 크엥 울며 보챈다. 우는 아기를 다시 눕히고 기저귀를 갈았다. 


이리 안고 저리 안아도 울음을 그칠 줄 몰라 더운가 싶어 옷을 한 겹 벗겨도 계속 울었다. 한 시간을 넘게 어르고 달래지만 그칠 줄 모르는 울음에 동희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어디가 아픈 걸까? 열은 없는데. 동희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큰 소리로 울고 있는 은행이를 가슴과 어깨에 걸쳐 세워 안고 피곤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재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기가 이렇게 오랫동안 울어대는데도 미동조차 않고 쿨쿨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에 속이 상한다. 남자 선배들의 '애가 밤에 울어대는데 집어던질 뻔했다'는 심정이 무언지 알 것 같다. 


그녀도 아기를 따라 펑펑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겨우 은행이를 안고 앉았는데 그제야 재이가 소란을 눈치챈 듯 부스스 일어났다. 남자는 멍한 표정의 동희와 목이 쉬어라 울고 있는 은행이를 발견하더니 일어나 그녀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고 일어나 섰다. 어깨에 걸치듯 안고 등을 두드리며 어르기 시작하자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아기는 크륵 큰 소리로 트림을 하더니 울음을 곧 그치고 재이의 품에서 스르륵 잠이 든다. 


"속이 불편했나 봐." 재이는 아기의 작은 등을 투덕투덕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 동희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이제 조용히 잘 수 있겠다고 생각한 재이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애를 달랠 줄도 모르고, 재울 줄도 모르고, 애기가 어디가 불편한지, 뭐가 아픈지도 몰라. 은행이도 재이 씨 품에서 더 잘 자고, 난 젖 먹이는 것 밖에 못하고... 분유 먹이면 되잖아. 정말 필요 없고 쓸모없어. 왜 나 같은 게 엄마가 된 거야! 회사에 나갈 거야. 휴직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정말 이런 거 너무 싫어!" 


동희는 갑자기 많은 말을 쏟아내더니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재이는 동희의 수그린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 그녀를 안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품 안에서 잠든 은행이를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던 슬링을 집어 들어 몸에 걸친 다음 잠든 아기를 천 안에 눕혔다. 작은 고치를 매달고 있는 나무둥치 같은 차림으로 재이는 장 문을 열어 패딩 점퍼를 꺼내 입었다. 지갑과 시계를 챙긴 다음 동희의 겨울 코트와 목도리 중 아무거나 하나씩 집어 든 그는 그녀가 울고 있는 방으로 다시 향했다. 들고 있던 그녀의 옷 가지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등 위로 떨어 뜨리듯 건네었다.


"뭐예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짜증내는 동희에게 재이는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입어요. 나가자."

"새벽 3시예요!"

"얼른 입어. 나가자. 방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일어나." 


재이는 눈썹 끝을 추켜올리며 낮고 예민한 목소리로 끊어 말했다.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남자를 노려보던 동희는 눈물을 훔치며 등 위에 걸쳐진 코트에 팔을 꿰었다. 운동화를 신고 문을 열어 현관만 나섰을 뿐인데도 복도에서부터 싸늘한 냉기가 확 끼쳤다. 


"은행이는?"

"내가 안았어." 훌쩍거리는 목소리로 묻는 그녀에게 재이는 짧게 대답하면서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은 아파트 주위를 걸었다. 주변은 조용했고 싸늘한 바람 소리만 들렸다. 재이는 양말을 신지 않은 운동화 속 발이 시렸다. 그녀 역시 발이 춥겠지. 그는 생각하며 동희보다 앞서 천천히 걸었고, 뒤따라오는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코트를 걸친 어깨 위로 두른 목도리 사이로 코와 눈만 내민 동희는 가끔씩 코를 훌쩍일 뿐 조용했다. 품 속의 아이는 따뜻한 체온을 그에게 나누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비쭉비쭉 녹색 바늘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 곁을 지나 재이는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랜드 크루저 앞에 섰다. 그의 걸음을 따르던 동희도 멈춰 섰고 그제야 재이를 올려다보았다. 안경을 쓰지 않은 눈이 울음으로 새빨갛고 추위로 코 끝과 양 볼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재이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앉아."

동희는 수동적인 태도로 그가 시키는 대로 차 안으로 올라가 가만히 앉았다. 그는 그녀가 다리를 집어넣은 것을 확인하고 문을 살짝 닫았다. 차의 뒷부분을 돌아 카시트가 놓여 았는 뒷좌석 문을 열고 패딩 점퍼 안 슬링에서 잠든 은행이를 안아서 카시트에 눕히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내복 바람인 아기의 모습이 추워 보여서 그의 점퍼를 벗어 카시트 위에 덮은 다음 문을 살짝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24시간 영업 편의점과 주유소가 띄엄띄엄 있는 도로를 계속 달려 서울 시내 번화가로 오니 새벽 4시를 갓 넘긴 시간에도 거리 곳곳은 불을 밝힌 간판으로 환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카페 체인점 안에는 송년 모임에서 거나하게 걸친 젊은이들이 커피로 해장하며 눕듯 앉아 있었고, 길가 빵집 주인은 가게 셔터를 올리고 간판에 불을 켜고 있었다. 술 취한 손님을 태우기 위해 줄을 서 있는 택시들 곁을 지나 달리던 재이는 어느 간판을 발견하고 속도를 줄여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갔다 와요. 은행이랑 여기 있을게." 재이는 동희에게 신용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 동희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과 내민 카드를 번갈아 보자 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협박하는 어조로 말했다.

"위에 미용실 있어. 갔다 와요. 그리고 나간 김에 한 바퀴 돌고 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재이의 손에서 카드를 받아 들었다. 차에서 내려 건물을 올려다보니 정말로 영업 중인 미용실이 있었다. 그녀는 차 안의 남자와 아기의 그림자를 잠시 보고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3시부터 새벽 5시까지라는 영업시간 간판을 붙인 미용실 안에는 손님이 두 명이나 있었다. 검은 티셔츠와 검은 가죽바지를 입고 양 팔에는 가득 문신을 그려 넣은 덩치 큰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조금 다듬으려고요."

동희가 서먹한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에 싱긋 미소를 띠고는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코트 주세요. 보관해드릴게요."



머리를 감고 짧은 단발로 손질한 동희는 건물을 나왔다. 남자와 아기는 차 안에서 잠을 자는지 무얼 하는지 기척도 없이 조용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건너 빵집 앞에 파란색으로 도장된 배달 트럭이 멈춰 섰다. 배달원과 빵집 종업원은 짐칸 문을 열고 케이크가 담긴 네모 상자들을 수도 없이 내려 나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모든 잎을 떨군 가로수의 앙상한 맨 가지마다 열매처럼 매달린 작은 전구들이 노랗고 하얀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구나.' 그제야 동희는 외롭고 춥고 괴로웠던 그늘에서 갑자기 현실로 끄집어내진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진하고 구수한 커피 볶는 냄새가 풍겼다. 몇 걸음 걸어가니 번화가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아담한 커피가게가 있었는데 그 겨울 그 시간에 가게 문을 열고 로스팅을 하고 있었다. 그르렁거리는 기계 소음 너머로 커피를 주문하니 염색한 금발 머리 위에 빨간 두건을 두른 가게 주인은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원두를 고르라는 말을 들으며 동희는 목록을 훑었다.


"에티오피아 될까요?"

"물론이에요. 진하게 내려드릴까요?" 동희가  네,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다시 환하게 웃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라인더의 레버를 움직였다.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종이컵에 담아 들고 돌아선 그녀는 걸음을 옮겨 자동차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재이는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잠들어 있었다. 차 안은 히터에서 나오는 건조한 바람과 남자와 아기의 온도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동희가 차에 올라타서 문을 닫는 소리에 잠에서 깬 재이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아무 말 않고 앉아만 있었다. 그는 시트 등받이를 세우고 시동을 걸었다. 방향 지시등을 켜고 도로로 올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유턴 차선에 멈춰 신호를 기다렸다. 


"고마워요."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들은 재이는 어둠 속에서 싱긋 웃었다.

"케이크 사갈까?" 눈은 신호등을 향한 채 그녀에게 물었다.

"응." 동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숙였다. 주황색 신호등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

안녕하세요, 소년 아입니다. 40쪽으로 끝낸다더니 뭐지, 이건! 하지 마시어요(꼼질꼼질) 40쪽에 넣으려다가 잘린 부분이지만 꼭꼭꼭 쓰고 싶었던 장면이라서 이렇게 에필로그로 삼았습니다:D 아차, 수다 떨 때가 아니지.


넙죽넙죽!


일단 절부터 하고요(_///_)


<<브레게 스타일>>을 읽어주시고 동희와 재이를 예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전자책 출간 예정이에요:D 

이제 막 계약을 체결한 터라 언제 어떤 제목,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몰라서 저도 생경하고 두근두근합니다. 자체 검열 삭제한 페이지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사와요.


글을 출판사에 소개해주신 누님, 

연락 주신 미인 과장님, 

응원해주신 낭군님과 정순훈 선생님, 놈팡이 님, 루크 님, 위장효과 님, 선주 님, 알렉세이 님,  

읽어주신 모든 분들과 글쓰기 좋은 플랫폼 브런치, 그리고 신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부터 브런치의 연재분은 모두 비공개됩니다: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