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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사람 Sep 12. 2018

마귀(魔鬼)가 만든 어제와 오늘-上 (3부)

고시엔구장(甲子園球場)의 마귀(魔鬼)에 홀린 아이들과 어른

 100년, 1세기. 우리가 보통 사회에 나와 30년 정도 일 하면 은퇴한다고 한다. 즉, 고시엔 구장은 사람으로 대비 해 보자면 3세대 정도의 시간을 보낸 것.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100년의 역사지만, 안타깝게도 고시엔 구장이 태어난 시기는 한창 일본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준 시기이다.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대만은 이 시기를 우리와 전혀 다르게 본다. 즉, 정서 자체가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일본에서는 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신식 운동장이 필요하다는 여론 형성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지금의 고시엔 구장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돌이키기 싫지만 잊지 말아야 할 역사도 섞인 고시엔 구장에 대해 퀴즈 형식으로 과거와 지금을 담담하게 풀어 가 본다. 


 1) 고시엔 대회에 일제시대 조선의 학교는 참여 했을까, 안 했을까


 참여했다. 심지어 대만도 참여했으며 (대만은 참고로 50년간 지배를 받았다.) 일제가 중국 만주를 점령 후 만든 만주국(滿州國) 출신의 팀도 본선 대회에 참가했다. 잘 살펴보면 우리에게도 낯이 익은 학교들의 이름을 생생하게 찾아 볼 수 있다.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3루측 외야(좌익수 쪽)에 위치한 고시엔 구장 역사 박물관. 가면 벽면 한 곳에 참여했던 야구팀을 공에 인쇄 해 전시 해 놓은 코너가 있다.


 잘 찾아보면 부산상고(현 개성고), 경성중, 휘문고보(현 휘문고). 경성상고(서울대 상대 전신), 대구상고 (현 대구 상원고), 평양중, 용산중(現 용산고), 선린상고 (현 선린인터넷고교), 인천고 이렇게 참여했다. 다만, 순수 조선 사람들로 이루어져 출전한 팀은 저 중 휘문고교가 유일하다. 즉,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인 선수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순수한 조선 사람들의 팀이라고 보기 힘든 것. 


 그런데 대한민국과 대만이 보는 시각은 '솔직히' 완전히 다르다. 2가지 역사적인 사실은 이제부터 남기겠는데 한 번 어떤 느낌인지 각자 판단 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좋을 것 같다. 판단은 각자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야구 역사 1) 1923년 조선대회 우승팀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는 1924년부터 3년간 고시엔 대회 출장을 하지 않았다. 1924년 7월 20일 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大阪朝日新聞)판에는 이를 가리켜 '이변'이라고 표시하였다. 충분히 나올만한 실력을 갖춘 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 게다가 당시 조선 경성(京城-지금의 서울)의 강호 배재고등학교는 하와이 원정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을 시기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당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출처는 (白球の世紀:49)覇者に「異変」、空白3年 高校野球. 휘문고보 (현 휘문고)의 동맹휴학과 관련한 기사. 1924년 9월 3일 오사카아사히신문의 일부


 이 답은 조금 앞으로 거슬러 올라 가 보면 찾을 수 있다. 당시 동아일보의 1924년 6월 18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휘문맹휴확대(徽文盟休拡大)'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여기서 맹휴(盟休)는 동맹휴학(同盟休學)의 줄인 말. 당시 휘문고보는 학교와 교사들이 보여 준 입장(미진한 조선어, 조선 역사 교육 등)에 대해 항의로 학생들이 동맹휴학이라는 '시위'를 벌인 것. 같은 해 7월 1일에는 이미 동맹휴학 관련하여 3월에 운동선수를 낙제 처리 한 것으로 기사가 나기도 하였다. 추측컨데, 끊임없는 차별과 친일 성향의 교육, 거기에 선수 수급의 애로사항 등 문제가 복합적으로 붉어지자 휘문고보는 대회 출장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추가로 1924년 9월 4일 동아일보의 사설에서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학교는 700명 가까이 하는 학생들을 퇴학 처분하였고 경찰은 별 이유 없이 40~50명의 학생을 구속하였다. 이는 큰 불상사다. 그러나 경찰의 간섭은 부당하다는 이야기를 얻지는 못 했다.'


 결국 휘문고보 역시 나라 잃은 설움을 겪었고 이는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자료 출처가 일본 기사인 관계로 글이 다소 매끄럽지 못 한 부분이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야구 역사 2) 1931년, 당시 대만 출신의 학교가 대회 결승전까지 진출해 지금까지도 화제로 삼는 사건이 있다. (뭐랄까? 다소 일본인들이 대견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한 느낌도 있다.) 실제 영화로도 나왔기도 하였고. 이 영화는 2014년 대만 개봉 후 2015년에 일본에 상륙했다. 일본 개봉 당시 이 영화 제목은 「KANO~1931 海の向こうの甲子園~」(KANO~1931 바다 건너의 고시엔). 이 당시 출전했던 팀은 대만의 嘉義農林学校 (가의농림학교). 이걸 일본어로 읽으면 '카기 노오린 캇코오'다. 즉, '카'와 '노'만 따서 유니폼에 '카노'라고 한 것. 


영화 카노의 포스터. 출처는 일본 야후.

 

 스토리는 일본의 한 고교 야구 감독이 대만으로 건너가 최약체 고교 팀을 초인적인 특훈을 통해 승승장구하여 고시엔 결승전까지 오르는 내용. 스포츠 영화에 익숙하다면 너무나도 불 구경 보듯한 이야기. 위의 사진을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팀의 선수 구성이 독특하다. 당시 순수 대만 고교 팀은 아니었던 것. 홈페이지에 영화 스토리를를 소개 해 놓은 것에 따르면 수비를 잘 하는 일본 학생, 타격을 잘 하는 한족 대만 학생 (주1: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민족), 빠른 발을 보유한 대만 원주민 학생 (주2: 이전부터 대만 섬에 거주한 원주민 계통)이 섞인 팀이었다.


 이 중 대 활약을 한 선수는 한족출신의 대만 학생 오명첩(呉明捷-고 메이쇼우. 영화 속에서는 '아키라'라고 한다. 아마 창씨개명을 진행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영화 속에서 4번타자 겸 팀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좀 더 이 사람을 소개하자면, 이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진학 해 계속 야구를 하였는데 11회 도쿄6대학리그 (참가 대학교: 도쿄, 게이오, 와세다, 릿쿄, 메이지, 호세이) 가을 대회에서 타격 1위를 차지 해 수위타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후 실업야구 등에서 활약하였고 45년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은퇴했다. 이 후 일반인으로 평범하게 살다 1983년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에서 스크린 샷 몇 장 볼 수 있는 것이 전부인 이 영화는 YOUTUBE에서는 상당히 많은 동영상이 돌고 있다. 관심이 간다면 몇 장면을 한 번 돌려 보는 것도 괜찮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보기 불편한 영화. 우리와 달리 대만은 일제 식민지 통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이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 대사의 90%가 '일본어'다. '대만이면 중국어가 더 나와야 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정서와 달라 이게 대만 영화인지 일본 영화인지 헷깔릴 수 있는 부분.  


 아무튼 같은 식민지 시대를 관통했던 두 나라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 중 하나가 아닐까. 


출처: 果子電影. 대만영화이나 놀랍게도 일제 시대에 대한 그리움(?)마저 느껴진다.


 2) 고시엔 구장도 2차 대전의 영향을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받았다.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들의 공통적인 점은 나라 전체가 일종에 자국 우월주의 또는 전체주의가 휩쓸어버린다는 것. 당시 일본은 정부가 내 세우는 '성전(聖戰)'에 참여해야 하고 이 논리 아래 국민에게 전쟁 동원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권유 또는 강요했다. (꼭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당시 일제의 국가 총동원령으로 인해 우리의 많은 무고한 조상님들이 강제 징용, 징병 심지어 여성은 정신대로 끌려가 성노예로 이용 당했다.)


 고시엔 구장도 예외 일 수 없었다. 내야석에 보면 거대한 지붕을 볼 수 있다. 지금이야 특수합금이지만 당시 저 지붕의 재료가 철이기 때문에 전쟁터로 '끌려갔던' 것. 이 후 약 7년간 지붕 없이 야구장을 운영하다 1950년대 비로소 다시 내야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지붕이 올라 간 것이다. 고시엔 구장도 일본이 내세운 성전(聖戰)의 광기에서 결국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전쟁의 광기는 결국 대회 중단까지 이어졌다. 실제 1942, 1943, 1944년은 전쟁을 위해 대회 진행을 하지 않았던 것. 결국 1945년에야 다시 대회가 열렸다. 참고로 현지에서는 지붕을 은산(銀傘)이라고 일컫는다.


출처: 한큐한신그룹 홈페이지. 내야 일부 지붕이 눈에 띌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맞추어 태양광도 설치했다.


 잠깐 이야기가 새 나가버렸지만, 물론 지붕도 시설물이기 때문에 낡으면 교체를 진행한다. 지금의 지붕은 4대째 지붕이다. 2009년에 교체를 진행했고 특이 사항이라면 지붕 위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 해 전기 생산을 하고 있다. 야간 경기에 사용 할 라이트의 전력은 생산하는 양이라고.


3) 고시엔 구장은 야구만 한다


 아니다. 애초에 설계 및 개장 목적이 '다목적구장'이었다. 이 때문에 야구 외에 꽤 크게 열리는 대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미식축구. 1947년부터 '고시엔 볼'이라는 미식축구 대회를 연다. '전일본미식축구대회'인데 겨울에만 열리는 몇 없는 볼거리 중 하나. 매년 겨울에 열리는데 꽤 쌀살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겉 옷을 입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미식축구를 감상한다. 고시엔 볼은 고시엔 구장 역사박물관에도 볼 수 있으니 기회가 닿는다면 어떤지 구경 해 보는 것도 특색.


 희한한 사실 하나 더 추가하면, 고시엔 구장은 과거에 1937년 겨울에 스키점프 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것이 제 1회 대회였고 이 후 도쿄의 고라쿠엔(後樂園)으로 로 옮겨서 했다. 그렇지만 이 대회는 그렇게 오래 지속하지는 않은 모양새다. 아무래도 산 위에 스키 점프대를 건설 할 만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경기장이나 공터에서 하려니 눈도 공수 해 봐야 하고 이래저래 불편했던 모양.


출처: 고시엔 볼(bowl) 대회 공식 홈페이지. 대회 광고 포스터.


(4부: 1991, 1995년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 지금은 사라진 숨은 시설과 먹거리에 관한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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