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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May 06. 2024

갈등을 대하는 방식

어떻게 해야 했을까

2024.5.6 월


매달 5일 가계부 정산일이다. 남편은 딱 한 가지만 정신 차리고 해라고 했다. 매달 지출의 규모를 줄이고, 돈의 흐름을 파악하라고 말이다. 결국은 저축을 늘이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예측가능한 것이 중요한 사람이다. 예전에는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에 대비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지금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왔을까.


우리는 회사 동료로 만나 결혼한 맞벌이 부부였다. 신혼초 시댁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집을 구해서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세자금 정도는 지원해 주신다고 하셨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오고 가며 결국 그러지 못했다. 남편은 당시 다니던 회사 월급으로는 분가를 하지 못 할거 같다고 예측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영업을 시작했고, 그는 꼿꼿함을 꿋꿋함으로 바꾸어가며 열심히 노력했다. 몇 개 직업, 회사를 거쳐 창업 후 현재에 이르렀다. 그는 자수성가했다. 시댁 도움을 일절 받지 않았다.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다. 한동안 우리에게 과일은 사치였다. 제철과일 중 현지생산된 B급 과일은 가격이 착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아이들과 나는 딸기맛을 보았다. 그렇게 십수 년을 보냈다. 빚은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는 친구였었더랬다. 남편은 그랬다. "어차피 마이너스, 스트레스받지 말고 모을 생각하지 마."

처음에는 그래도 되나 싶었다. 하긴 매달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언감생심 모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 유리한 말은 적용하자 싶었다. 그렇게 십수 년이 지났다. 저축과 친해지지 않은 채 말이다.


이제 삶의 전환이 필요한 순간이 왔다. 이제 저축을 해야 한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숫자에 약하다는 핑계로 남편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남편은 처음에는 설명하다가 중간에 협박도 했다가 이제는 화를 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어? 나를 존중하긴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나 또한 그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었다. 남편이 항상 "내 말을 제대로 듣는 거야!!"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있었다. 항상 서운했었다. 그의 말투에, 행동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 존중하지 않는 거라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종종 비난했다. 그를 향해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공격받는다고 판단하고 다시 나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려주었다. 그러면 큰 싸움으로 번졌다. 각자 자신의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순간이 오면, 부딪혔고 몸도 마음도 상처를 남겼다. 특히 마음의 상처는 오래 남았다.


 당시엔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부분만 크게 보였을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에만 집중했었다. 그 아래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하지 못했다. 사실 난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가. 그저 받은 상처를 소리 내어 크게 아프다고 표현한다는 것이 또 갈등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가계부도 그러했다. 결혼 생활 내내 경제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처음에는 회피했다. 그다음은 나의 소비패턴과 수에 약한 성향을 인정했다. 이제는 개선을 향해 나아갈 순간인데 나는 또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못 할 텐데.' 스스로 작아졌고, 내가 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2023년 1월부터는 남편이 우리 내화 내용 중 60퍼센트 이상을 이 부분을 지적하는데 할애하였고, 나는 더욱 도망갔다. 올해부터는 아예 이 이야기만 했다. 남편과 대화 자체를 피하기에 이르렀다.


올해 1월 그는 진지하게 엑셀시트를 펼쳐놓고 왜 이렇게 가계부를 정리해야 하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당시 나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행동까지 이르는 힘을 내지 못했다. 이제는 매달 5일 가계부를 정리해서 제출하지만, '규모 있게 쓴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젯밤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관념을 나에게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이 열릴 때까지 말이다. 순조롭게 이해하게 된 건 아니다. 또 인생의 기억에 크게 남을만한 갈등을 겪고, 그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왜 인생은 공부처럼 책을 보며 차근차근할 수 없는가. 아쉬운 부분이다. 경험은 왜 급작스럽게 다가오고 몸과 마음에 자국을 남기며 새기게 되는 것일까. 어제의 기억이 문신처럼 남을 것이고 그건 앞으로 나의 경제관념정립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나의 경제적 안정'이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나'의 안정. 그 또한 노력하고 있었다. "여자 ENTJ가 이십 대에 결혼해서 육아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이제 알 거 같아. 그래서 주변사람들도 고생하고." 어디서 찾아봤는지, 여자 ENTJ는 특히나 1퍼센트 밖에 되지 않더라며 말을 이어갔다. 순간적으로 그가 나를 이해하려고 정말 노력했구나 싶었다. 물론 표현방식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 아래 숨은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시간들이 길었다. 나는 내 마음을 제대로 몰랐는데 어떻게 상대에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갈등은 나도 상대로 모르는 내 마음에서부터 출발한 화살이었다. 나와 상대 모두에게 흔적을 남겼다.


밤사이 우리는 갈등을 겪고, 아침이 되었다. 그는 더 큰 싸움이 될까 봐 자리를 피하는 편이다. 아이에게 먼저 전화가 왔고, 그 후 내 전화가 울렸다. "어젯밤에는 미안했어. 오늘 같이 나갈래?"


사실 나는 이미 나갈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집에만 있으면 우울해진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집에 있었다면, 지난밤의 갈등을 떠올리며 되새김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는 떠나보내는 게 낫다. 현재는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이 쌓여서 미래로 이어진다.


오늘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비로소 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노트북을 켰다. 오늘 지출한 영수증이 내 옆에 쌓여있다. 잠들기 전에 가계부에 입력을 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은 내용을 내 방식대로 정리해서 이번 달에는 실천해보려 한다.


갈등을 제대로 대하는 방식, 첫 번째는 피하지 말고 마주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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