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나?'
2025.10.3 금
연휴 첫날, 융의 '분석심리학세미나' 수업 6주 차 강의자료를 읽었다.
첫 장의 한 문장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과연 내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가?'
20대 나는 나를 참 모르고 살았다. 그 시절에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40대가 되었다. 이제는 나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멈칫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나?'
진정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가?
사회 또는 사람들의 기대로 만들어진 페르소나를 나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융이 말하는 '자기'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의식), 모르는 나(무의식)가 하나로 통합된 전체를 말한다고 한다.
그중 '자기 원형'은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로운 통합을 위한 내적 나침반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인데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한다.
융 심리학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이 참 많이 나온다. 그래서 재미있다.
오늘은 '자기실현'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그동안 이부영 선생님의 책 '자기와 자기실현'을 몇 주간 읽었다.
자기실현을 위해서는 자아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그래야 비로소 무의식과 의식의 '대극의 합일'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태도'였다.
보이지 않은 영역, 즉 '무의식'에 관심을 두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자아실현의 다른 말로는 '개성화'가 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자신이 되게 한다.'
'그 사람 자신의 전부가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페르소나로 사는 건 그 사람의 일부로 사는 것이다.
사회적 기대나 타인이 원하는 모습에 맞춰서 살면 자기 소외로 이어진다.
외부적 역할을 중요시하느라 자신의 내적 세계를 소홀히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건 인지하는 중이다.
올해 하반기는 '침잠'하려고 한다.
융이 말하는 '자기실현'은 페르소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모습도 나이고, 저 모습도 나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전체 실현이 가능하다고.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나의 내적 작업은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 작업이 아니었을까.
무의식은 끝없는 세계이기에, 아무리 의식화해도 미지의 세계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아'보다 '자기'가 더 큰 개념이라고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9년간 남편을 '자기'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동안 더 큰 세계를 찾아왔던 내면세계와 만남을 위한
열쇠가 아니었을까.
내 삶의 여정 중 큰 영역이었다.
결혼 그리고 육아.
아직도 나를 찾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정리가 안된 글이라도
오늘 생각하고 느낀 걸 일기로 남겨두기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