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세사기 피해자입니다.
사기라는 게 나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던 때가 있었다.
거리감은 ’사기를 당하는 너가 바보다.‘ 라는
배타적인 심리에서 비롯되어,
나는 철이없게도
매번 사기꾼보다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쪽에 서있었다.
그런 내가 전세사기 피해자라니.
보일러가 고장나 새로운 집주인에게 했던 연락이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는 회신으로 돌아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그럴수도 있지, 만기일까지 묻어두자 생각했지만
만약 이게 진짜라면..
2억이나 되는 전세자금대출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소한 회피가 성격인 나한테 있어서도
똑바로 보아야 한다는 외침이 가슴에서 울려왔다.
33년간의 인생이, 아니 그만큼 더 살아야하는
앞으로의 인생이 달렸다고.
등기부등본을 확인하니
새로운 집주인에게 압류가 걸려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집주인이 바뀌기 전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받아놓았었다.
안심전세대출이었던 걸 생각해내고
조퇴를 하고 급하게 허그 서부지사를 찾아갔다.
물론 이사당일 집주인이 바뀌어 버렸고
그러니 내잘못이 아니라고 중얼거렸지만,
이상하게 약해진 마음에 운전도중 계속 눈물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가장 먼저 한 생각은
퇴근하고 세신사라도 되어야 하나
길치인데 배달일을 할 수 있을까 였다.
지금은 이행조건들을 안내받아
절차를 하나씩 진행중이다.
내용증명 발송 후 공시송달까지 결정되었고
이제 만기일이 되면 임차권 등기설정만 하면 된다.
등기설정은 신청 후 한달 정도 걸린다고 한다.
보증금도 신청 후 한달 뒤 지급된다고 하니..
5월말 만기인 이집에서 나가려면
적어도 6개월은 더 있어야 하며,
잘 마무리되어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절차만 이행하면 된다는 직원의 말에도
난 주말이면 우울하게 누워있었다.
전세사기 사례들을 찾아보고 또 찾아보고
혹시나 좋지 않은 결말에 나도 포함이 될까
가슴을 떨며 두어달을 지낸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아직 반년도 더 남은 이 시간들과
또 차근히 절차를 밟아가고 있는 내 자신을
아껴줘야지
걱정해서 걱정이 해결되지 않는데
접어둬야지
세상의 나쁜일을 당한 계기로
조금 더 내 경제적 독립을 이뤄가야지
생각했다.
누군가
“너 혹시 이런 사례 아니야?” “주인이 죽으면 어떡해?”
하는 걱정어린 조용한 배려들을,
그러나 나에겐 아주 큰 태풍 같은 소리들을
흔들리지 말고 차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집에 이사를 올 때
이사업체에서는 사전에 없던 추가비용을 불렀고
추가비용으로 온 새트럭에는
내 짐이 아닌 빈박스가 가득 담겨 도착했다.
(짐 드는걸 도와준댔더니 빈박스를 들고 허둥지둥 하던 사장님 모습이 기억난다)
청소업체는 계약금만 받고 연락이 두절됐고
급하게 의뢰한 업체에서는
중국인 아줌마 5명을 대동하고 들어와
코팅안된 나무를 철수세미로 박박 닦아댔다.
(아줌마들한테 시발 여기 닦으라고! 하면서 소리쳤다)
둘다 이제와보면 사기였고
이집의 종말에 대한 복선이었던 것 같다.
눈치없게도 난 그들이 밉지가 않았고
사기라는 생각도 못한 채
그럴 수 있다고 넘겨버리는 멍청한 이타주의자였다.
물론 아직도 임대인에게 올 연락을 기다리지만,
심적 확신으로는 사기가 맞는 것 같다.
그치만 이제 내 탓은 전혀 하지않고
결코 우울하지도 않다.
몇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보같은 피해자가 아닌 죽일놈의 사기꾼이 되었고,
전세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고,
평범하게 굴러가는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건지
깨닫게됐다.
85000원짜리 요금제를 쓰면서도,
매일 택시를 타면서도
취해서 술자리를 혼자 계산하면서도
돈 아까운 줄 몰랐던 나는
안좋은 일로 인해
미래의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다.
몇번이나 행복이 가까이에 있는지
멀리에 있는지 몰라 헷갈렸지만,
행복은 그냥 여기에 있는게 맞는 것 같다.
지루함과 익숙함에
아주살짝 가려져있을 뿐이다.
6개월뒤 난 이집에서 잘 나갈거다.
이일을 계기로,
내집마련의 시기가 앞당겨질거라 믿는다.
모두 다 잘될거다.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