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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이진 Oct 20. 2020

어떤 말과 어떤 행동

아이와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있는 일은 고역이다. 하루 세 번 밥을 챙겨 떠 먹이고, 낮잠을 자거나, 똥을 싸거나 목욕을 하는 시간 외에는 옆에서 같이 놀아주어야 한다. 노는데 그냥 옆에 있으면 안된다. 모든 말과 상황에 반응을 해주어야 한다. 아이는 같이 놀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동차를 일렬로 세우거나, 스티커를 땠다 붙였나 하거나, 공을 던지거나, 색연필을 들고 낙서를 하거나... 한 두번은 아이를 즐겁게 해준다는 사명감으로 놀지만,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큰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 놀이라 흠뻑 빠져들어 즐거울 수가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외출을 하는 게 낫다. 횟집 간판에 붙어있는 생선 조형물도 아이에게는 볼 거리가 되고 자극이 되니, 나는 그냥 유모차를 열심히 밀고 걸어가면 된다. 이번 토요일도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주말이라 아이가 있는 가족은 대체적으로 아빠 엄마가 함께 놀러 나오지만, 우리 집의 특성상 그럴 수가 없어 혼자 나왔다. 그날의 목적지는 ‘어린이 박물관’. 가깝고, 저렴하고, 많은 체험을 할 수 있어 종종가는 곳이다. 두 정거장 정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일은 기차를 타는 기분을 낼 수 있어 아이가 재밌어 하기에 만족스러운 경로다.


지하철에서 내려 주먹밥을 사들고 가려고 분식집에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지갑이 없는 것이다. 가방에도 없고 유모차에 거는 주머니에도 없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 드문 삶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지하철에서 카드를 찍고 나왔는데... 아마 그 이후에 가방으로 넣다가 떨어진 것이라 추측하고, 주먹밥을 대기시키고, 지하철 역사로 다시 황급히 돌아갔다.


유모차는 지하철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 사용자 대부분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무거운 짐을 들고 계신 노인, 그리고 유모차가 있는 아이와 엄마다. 여기 저기 지갑이 떨어진 곳이 없는지 살피며 조급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까지 왔다. 급한 마음에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5번째 탑승자(?)로 몸을 밀어 넣었는데 무게가 넘어서 다음에 타라는 메세지가 나오는 것이다. 성인 3명 외에 할아버지, 아줌마, 나와 유모차가 내렸다. 3명밖에 못타는 엘리베이터라니!


그렇게 다시 올라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게 된 사람들이 셋이 되었다. 할아버지, 새롭게 등장한 할머니, 그리고 나와 유모차. 기다리는 중에 할아버지가 아이가 탄 유모차를 보며 말했다.


“요즘 아이 키우기 힘들죠?”

“네.. 뭐.. 힘들죠.”

(엘리베이터를 탔다.)

“뭐.. 요즘 사람들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찮아요~ 우리 때를 생각해보면... (같이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동의를 구하며) ... 그 때랑 비교가 안돼지....그치 않아요?”

(계속 동의를 구하는 할아버지에게) 할머니가 말했다.

“뭐, 그때랑 지금은 시대가 다르잖아요~”

“그래도 그때는 몇 명을 나아서 .. 힘들게... 키웠는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 허험... 아이 잘 키우세요오 ~ ~ .”

“..아. 네. ”


마음이 급해서 대충 대답하고 지갑을 찾으러 갔다. 다행이 천사같은 분이 역무실에 지갑을 맡겨놔주어서 지갑은 무사히 나에게로 돌아왔다. 지갑으로 잠시 행복을 누리고 나니, 아까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나에게 힘드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을 하기 그랬던 건, 나의 힘듦이 궁금한 게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질문은 할아버지의 생각을 말하기 위한 도입부에 불과했다. 질문 뒤엔 어김없이 ‘우리 때는...’ 이라는 전형적 불통 화법이 이어졌다. 난 그 할아버지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힘들죠 ...... 아이 잘 키우세요. 도입과 말미의 문장에 담긴 선의는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쉽게 타인의 힘듬을 재단하는 것인가? 왜 그렇게 쉽게 그 천차만별의 삶을 대어 비교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치 않아요~ 하며 동의를 구하는 할아버지에게 조금의 동조의 몸짓도 하지 않았던 할머니에게 내심 고마웠다. 시대가 다르다고 딱 잘라 말하는 그 말투에 이상한 안도감까지 들었다. 여기 나 혼자만 있는 건 아니구나. 하기 싫은 대답 정말 안해도 되는구나.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였던 가부장 문화 속에서, 타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도 돌아보고 성찰할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그들의 시대에 죄를 묻는다 해도, 상상되는 구체적인 상황을 덮을 수는 없다. 다섯명 여섯명도 모자라 열 명의 아이들이 드글드글하던 집 안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달랐을지. 할아버지는 그랬고, 할머니는 이랬기에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물론 이 또한 나의 판단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타인의 힘듦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겠지.


타인의 힘듦을 쉽게 판단하는 한 사람의 말에 생각이 복잡해졌다가, 떨어져 있는 지갑을 주워 역무실에 가져다 준 사려깊은 한 사람의 행동으로 마음에 어떤 작은 희망이 피어났던 날.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일은 무엇인가, 매일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셀 수 없는 구체적 사례들 앞에서 매번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고민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201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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