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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Apr 02. 2024

한 번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노파의 글쓰기] 방송 불발

 작의

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10대에는 대학 가서 생각하라고 하고, 20대에는 취직 후에 생각하라고 하고. 그래서 간신히 취업의 바늘구멍을 뚫고 회사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나니 그제야 ‘나로 살고 싶다’라는 욕망이 성난 빚쟁이처럼 달려든다.


한 번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돈은 좀 있으면 좋겠다. 좀이 아니라 많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꾸역꾸역 다시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고 나면 언제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런 반복되는 일상은, 한때 ‘예술병’에 걸렸던 이들에게는 삶에 대한 의욕을 앗아갈 만큼 파괴적이다.


보리 역시 도무지 이 무의미한 일상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부수느니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이 쳇바퀴를 부숴버리기로 한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오랫동안 묻어놓았던 그 꿈, 소설가의 꿈을 꺼내어 비로소 나로 살아보기로 한다.


그랬더니 남편이 난리가 나고, 생계가 난리가 나고, 그 와중에 요만큼도 매력 없는 거부가 돈으로 유혹해온다. 어차피 사람보고 했어도 실패하긴 마찬가진데, 글이고 뭐고 때려치고 그냥 확 부잣집 사모님이나 돼 봐?


요즘 삼십 대들의 꿈과 욕망, 그리고 결혼 풍속을 이야기한다.


※인용 출처

최승자, <20년 후에, 지(芝)에게>,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99.


***

이런 드라마를 썼습니다.

라디오 드라마의 주 청취 층인 예비 작가님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날들의 연속이겠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서 묵묵하게 한 걸음씩, 계속 내딛길 바라며 썼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연락해서 최승자 시 인용 허가도 받았습니다. 청취자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제 이야기는 항상 꿈을 향해 걷는 사람들을 위한 응원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길 진지하게 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산적인 전남편도 나오고, 천박한 부자도 나오고, 질투심 쩌는 후배도 나와서 주인공을 흔들고 낙담시키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겁니다.


하지만 방송은 결국 불발됐습니다.

피디가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결혼해서 멀쩡한 회사 잘 다니던 애가 글을 쓰겠다고 이걸 다 때려치는지, 왜 학벌도 좋은 애가 굳이 가사관리사 알바를 하는지, 또 천억대의 부자가 왜 이런 여자에게 목을 매는지, 그는 설득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청소노동은 낯선 알바가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부잣집 가사관리사 알바를 찾는다.  또 여기서 부자 캐릭터는 이야기의 흥미를 위해 설정한 안타고니스트다. 50분짜리 극에서 그의 서사까지 치밀하게 넣었다간 RT가 넘친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나는 설득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피디가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새로 써오거나, 아니면 끝입니다.


그러나 새로 써온다고 해도 방송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최저시급으로 계산해도 당신은 이미 내게 150만원의 빚을 졌습니다. 나는 여기서 또 다시 내 삶의 보름을, 당신에게 갖다바칠 생각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흔들리는 30대의 이야기는,

명문대를 나와 억대의 연봉이 환갑까지 끊길 일 없는 50대 피디에겐 공감하기 어려운 소재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공 보리가 아닌, 40대 부자 캐릭터에 더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피디는 자신의 안전하고 좁은 틀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소설을 읽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들의 이야기 말고, 90퍼센트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저는 쓰는 사람입니다.

당신 역시 언젠가 제 이야기 속 한 명의 캐릭터로 사용될 겁니다. 자신을 똑똑하고 진보적인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은 미쳐버리고 마는, 꽉 막힌 꼰대 캐릭터로 말입니다.


150만원은 그 캐릭터의 생생한 실감을 얻기 위한 비용으로 지불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다른 좋은 작가님들과 원하는 드라마 많이 만드시기 바랍니다.


Ps.

사진은 사바세계를 잠시 벗어나기 위해 아침부터 경춘선을 타고 떠나는 중에 찍은 겁니다. 오늘의 동행인은 아니 에르노입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https://m.blog.naver.com/nopanopanopa/223402105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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