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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a May 13. 2016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

잊을 수 없는 말 한마디


써뒀던 글을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꺼내본다.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과 잊을 수 없는 한마디에 대하여.



  키는 일정한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성장통이라는 말이 증명하듯, 성장은 완만한 오르막이기보다 한순간 껑충 오르는 계단과도 같은 궤적을 그린다. 신체적 키만 그렇겠는가. 내 마음의 키도 그렇게 한순간 훌쩍 자랐던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어느 날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수업에 앞서 글짓기 대회 이야기를 꺼내셨다. 학교 대표로 대회에 나갈 사람을 뽑겠다는 말씀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그런 일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담임선생님이 점찍어둔 아이를 직접 지목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우리 반 담임이셨던 이활영 선생님은 달랐다.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직접 손을 들어 보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손을 들지 않고 내 이름만 수군거렸다. 내가 쓴 동화 ‘붉은 대야’가 쓰기 교과 선생님으로부터 극찬 받았던 일을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심 흐뭇했다. 이제 선생님께서 아이들의 말에 따라 나를 뽑아주시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엄마에게 이 소식을 알리면 분명 기뻐하시겠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글짓기 대회 상장이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직도 손 든 아이는 없었다. 나 역시 손을 들지 않고 기다렸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하고 싶은 사람 없냐는 말만 반복하셨다. 답답한 정적 속에, 한 아이가 어렵사리 손을 들곤 작은 소리로 질문했다. 엄마한테 물어보면 안 되겠느냐고. 동감이었다. 중요한 문제를 어린 우리의 뜻대로만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주머니 속의 십 원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선생님의 허락만 떨어지면 부리나케 공중전화로 달려가 엄마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기회가 있다. 그걸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대회에 나갈 자격 또한 없어. 엄마는 너희들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다.”

  선생님의 음성은 단호했다. 대표로 나갈 사람을 뽑지 않겠다는 말씀이 뒤에 이어졌고, 그걸 끝으로 선생님은 글짓기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는 하지 않으셨다. 책을 펴라고 하셨고, 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백일장에 나섰던 지난 몇 번의 경험이 머리를 스쳤다. 학교 대표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또 한번 달고 나갈 기대감에 벅차올랐던 나였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장밋빛 상상도 산산이 깨졌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속이 울렁거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후유증은 며칠을 갔다. 자꾸만 그날 일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무척이나 우울했다. 앓은 보람이 있었던 걸까. 하루하루 지날수록 내 마음의 상태도 조금씩 달라졌다. 선생님에 대한 원망이 자책으로, 그리고 깨달음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분명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의지도 열정도 있었지만 단 하나 부족했던 것이 용기였다. 그 탓에 나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직 어리니까 혼자 그런 결정은 할 수 없다고 여겼다. 6학년까지는 어린이고, 중학생부터 청소년이라는 편의적인 기준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보다 성숙한 나로 한 단계 뛰어올라야 할 순간이 불쑥 찾아왔을 때, 난 안이하게도 그냥 어린이에 머물기를 택했다. 손을 들고 “제가 하고 싶습니다”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놓친 기회가 더는 아깝지 않았다. 다른 때처럼 조용히 선생님의 간택을 기다려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면 어땠을까. 나는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가만히 되뇌어보았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얼마나 멋진 존재인가. 왜 나는 어리다는 빌미를 진작 벗어버리지 못했나. 손도 들지 않은 채 속으로 김칫국 마시고 있었던 내 자신이 참 부끄러웠다.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에 대해 이때껏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그건 글짓기 대회에 나가고 상을 타오는 것보다도 더 값진 깨달음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구름판 삼아, 그렇게 난 뒤늦었지만 중요한 도약을 하고 있었다.








p.s. 이활영 선생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다. 낡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시던 소탈한 모습, 촌지와 선물을 거절하시던 강직한 모습, 매 수업마다 열성을 다하셨던 모습, 졸업식날 눈물이 가득 고였던 선생님의 눈시울,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던 깊은 애정과 따뜻한 눈빛까지도 다 잊을 수 없다.


p.s.s. 지난 겨울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을 때 뛸듯이 기뻤다. 선생님은 여전하셨다. 그 여전하신 모습이 나에게 힘을 주었다. 선생님은 지금도 내게 깨달음을 주신다. 말씀 뿐 아니라 살아온 모습 그 자체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란 얼마나 멋진가. 그런 분이 나의 선생님이셨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그날 선생님이 주신 가르침에 대해서 얘기하곤 한다. 내 마음 속에도 새기고 싶은 말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선생님께서 이십여 년 전 그날 해주셨던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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