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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엄마 Feb 09. 2022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결혼 잘 하는 게 인생의 목표였던 사람.

"언니들! 만약에 10 전으로 돌아갈  있다고 하면 언니들은 지금 남편이랑 다시 결혼할 거에요?”


아이 엄마들 모임에서 가장 막내인 태은씨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태은씨는 나랑  살인가  살밖에 차이가 안나는데 1,2년으로는 극복되지 않을 만큼 귀엽다. 나는 작년이랑 재작년 그리고    전에도 저만큼 귀여운 말은 해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답하나 분위기를 살피려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 미리 질문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답을 했다. 그리곤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아이들이 여섯살이니 다들 최소 7년은 지금의 남편과 함께 살았고, 연애 기간까지 합치면 그와 함께 지낸지 이미 10 이상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정해진 답이 는 게 이상했다.


-


10 , 스물 일곱의 나는 인생의 목표가 ‘결혼을  하는  사람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아무래도... 다수의 고퀄리티 연애였다. 너무 짧은 연애는  도움이  됐다.  지론은 ‘사람을 알려면 그래도  계절은 겪어봐야지’, 였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하루라도  틈이 없었다. 이런  보며 엄마는 ‘제발 연애  그만하고  발전을 위해서 살라 하루 걸러 한번씩 잔소리를 했다. ‘너는남자없으면못사냐는식의말로수치심같은것을유발하기도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인신공격성 말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에 미래를 위해 가장 필요한 자산은 확실히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는데, 그 시발점은 아무래도 별로 안 행복해 보이는 엄마, 아빠 때문이었다. 분명 둘 다 능력도 있고 여러모로 재능도 많아서 사회에서는 인정 받는 사람들이었고, 인간 관계도 좋은 편이었는데 이상하게 둘은 서로의 단점만 보며 사는 것 같았다. 급기야 두 사람 때문에 나까지 영향을 받는 일들이 늘어갔다. 머리가 커지니 둘의 싸움에 점점 감정적으로 얽매이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는 집이 더이상 평안한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게 됐다. 안온한 날들이 이어지면 오히려 불안해졌다. 언제올지 모를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랄까. 혹시 다음 건 파도가 아니라 태풍이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


20대의 내가 소망하던 미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닦을 수, 몸 신, 가지런할 제, 집 가, 다스릴 치, 나라 국, 평평할 평, 하늘 천, 아래 하.


그래, 바로 이거였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수양해야 하고, 집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 그런뒤에야 나라도 다스릴  있고 천하를 평할 기회도 얻을수 있는 것이다.그런데'수신'이야 내가 하기 나름이겠지만 다음 단계부터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이룰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제가' 위해서 원만한 부부사이가 필수였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연애를 하는 데에는 이런  뜻이 있다고 말했다면 아마 엄마는 코웃음을 치면서 비웃었겠지만, 진짜로 나는 이런 야무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학점을 따고 공모전을 준비하고 토익 점수를 올리는  중요하다는 것도 당연히 맞는 말이지만, 나에겐 나름대로 미래를 향한 원대한 꿈이 있었단 말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챙기면서 연애도  하는 애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정도는  됐다. 나는 나를 너무  알았다.


나는 학교 공부도 안 했고, 토익 점수도 안 땄다. 공모전 준비도 안 했고, 동아리나 학회 활동도 안 했다. 그렇다고 음주가무를 즐기지도 않았다. 뭐, 그것 말고도 안 한 게 꽤 많았지만, 또 하나 유별나게 안 했던 건 떠나는 일이었다. 어디론가 여행을 가는 것도 싫었고, 어학 연수는 더 싫었다. 그냥 싫었다. 약간의 폐소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 타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하여튼 나는 꽤 오랫동안 ‘지금, 여기’를 벗어나는 걸 최대한 피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얼마 전 발견한 2014년의 메모를 읽으면서 어쩌면 그때 내가 떠나지 못했던 건 그냥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잠깐 들었다.


ㅡㅡㅡㅡ


2014.06.15_NY

해질녘 링컨센터와 이른 아침의 그리니치 빌리지. 잊을  없을 것만 같은  순간의 분위기. 햇빛 쨍쨍한 여름날의 센트럴 파크, 빠져들고 싶은 분홍빛 노을  브루클린 브릿지. 북적거리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주말 풍경과 24시간 반짝거리던 타임스퀘어. 42번가와 5번가, 그리고 7일간의 우리 .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뒤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일주일 동안 너무 재밌었는데, 이제 한국으로 가서 또 오빠랑 행복하게 지낼 생각하니까 너무 신난다!”


ㅡㅡㅡㅡ


왜인지 조금 슬퍼졌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 어쩌면 그게 떠날 수 있는 힘일지도 모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돼서까지 부모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한 건 대체로 나였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돌아보면 도움이 된 게 별로 없다. 둘을 위해 무언가 애쓰는 동안과 그 직후엔 관계에 있어 타인이란 얼마나 무력한가를 끊임없이 확인했을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부모의 결혼 생활을 책임져줄 수는 없고, 마찬가지로 부모라고 해도 자식의 결혼 생활을 책임져줄 수는 없다.


이걸 깨닫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그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당연한 거니까 괜찮았다. 뭐든 아는 게 중요하니까. 늦더라도 알았으면 된 거였다. 다만 이젠 그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야만 했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들을 확실히 깨달은 덕분에 나는 내 미래, 특히 결혼에 관련된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급기야 결혼을 ‘잘’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를 비롯한 누군가가 언제나 머물고 싶고, 다시 돌아오고 싶은 집으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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