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1- 04.12 생애 첫 고속도로 드라이브
엄청나게 힘들었던 촬영을 하나 끝내고 온종일을 잤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다리가 아파서(스튜디오 촬영이었는데 실내에서 신발을 신을 수 없어서 하루 종일 맨발로 뛰어다녔다. 그것은 정말.. 엄청나게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화장실 가는 열 걸음에도 세상의 온갖 욕을 끌어다 하며 어기적 어기적 걸어야 하는 그런 날이었다. 오늘은 걷는 걸 포기하자, 하고 누워있는데 이 나날들이 너무 아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아픈 거야 오늘 좀 쉬면 내일은 괜찮아질 텐데 내일은 뭐하지?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카톡을 한 통 보냈다.
야, 나 바다 보이는 데서 해물탕에 소주 먹고 싶다.
반응은 뜨거웠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기에, 친구들은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고 했다. (이때가 벌써 저녁 8-9시였다.) 이 엄청나고 급진적인 스피드에 '역시 내 친구들 답 군.' 만족하며 그러자고 했다. 김 총무가 버스 티켓을 결제했다. 숙소도 예약했다. 목적지는 양양의 동호해변. 강원도에 살고 있는 욱식님과 차름언니에게도 접선을 신청했다. 모든 게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웅자에게 연락이 왔다. '야, 우리 언니가 니 면허 있으니까 차 몰고 가라는데? 차 빌려준대.'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3월 제주도에서 찔끔 몰아 본 레이가 마지막 운전이었던 나에게, 서울에서 양양까지 올림픽 대로와 고속도로를 타라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기회였다. 이건 일일 보험료만 빼면, 공짜 도로연수의 수준이었다. 당연히 기름값도 친구들과 n빵일 것이고, 언니 차에는 하이패스도 달려있었기에 톨게이트마다 맞는 위치에 멈춰 섰는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차는 모닝! 큰 차도 아니었기에 (내 면허가 1종인 것은 정말 웃긴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경차에 적응해버렸을까?) 부담도 없었다. 그저 내 실력이 실제 도로에서 운전을 해도 되는가의 문제였다. 웅자에게 연락해 연습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언니는 초보자에게는 고속도로가 더 쉬운 법이라며 호탕하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우선 내가 웅자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언니 차를 몰고 차로 20분 거리인 김 총무네 집에서 김 총무를 픽업해 웅자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게 내가 생각해낸 연습 코스였다. 택시를 불렀다.
웅자네 집에 들어서며 언니에게 불쌍한 눈빛을 쏘았다. 언니, 제 옆에 타 주세요. 하지만 언니는 쿨하게 자러 들어가겠다며 차 키만을 내게 쥐어주었다. 웅자와 나는 반신반의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우선은 일일 보험을 넣어야 하니까 차 사진을 찍었다. 출발하려는데 바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야! 이거 어떡해! 결국 언니한테 전화를 했고, 언니가 내려왔다. 원인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지 않은 체 출발한 나의 과실... 언니는 초보때는 다 그런 법이라며 쿨하게 올라갔다. 출발하며 웅자에게 물었다. 유서 썼니? 사망보험은 있니? 웅자는 진짜로 남자 친구에게 유서를 보냈다.
그러나 운전은... 체질에 잘 맞았다. 김 총무 집까지 스무스하게 도착했다. 그 어렵다는 일자 주차도 성공했다. 우리끼리는 이미 모든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고 있는 김 총무 집에 쳐들어가 그녀를 깨웠다. 착하게도 그녀는 욕 한마디 하지 않고 '야.. 너무 놀랬다..' 하며 잘 일어났다. 그녀가 씻고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웅자와 나는 영웅담처럼 운전 얘기를 했다. 김 총무가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사람이라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한 번 타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웅자 집에 도착했다.
죽지 않고 돌아온 우리는 강원도까지 한 번 차로 가보자 하고 대동 단결했다. (운전은 내가 하는데 너네가 왜!) 꽤 먼 거리에 사는 우니를 픽업하러 갈까 했지만 그러려면 올림픽 대로를 탔다가 빠졌다가 다시 타야 하는 루트라 자신이 없어 동네로 불렀다. 그녀가 올 때까지 김 총무와 둘이서 잠깐 잤다. 우니가 대충 다 와 갈 때쯤 웅자가 우리를 깨웠고, 잠깐 잠을 깬 후에 우리는 다시 차에 탔다. 목동역에서 우니를 픽업하고, 진짜로 강원도로 출발했다. 올림픽 대로도 고속도로도 처음이라 조금은 긴장이 됐지만, 친구들이 '야 놀러 가다가 죽으면 호상이다!'하고 말해준 덕분에 자신 있게 액셀을 밟았다.
올림픽 대로는 듣던 대로 정말 혼잡했다. 합류 차선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교통 정체가 심했다. 심할 때는 거의 주차장이었다. 기어간다는 말이 딱이었다. 하지만 고속도로는 언니 말이 맞았다. 정말 쉬웠다. 그냥 달리기만 하면 돼서, 100 이상 밟지 않도록 주의하는데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터널도 그냥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도 통과했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김 총무는 뒷좌석에서 내내 잤다. 우니도. 웅자는 졸려했지만 조수석에 앉은 죄로 자지 못했다. 음악을 들으며 시원하게 달리는 게 즐거웠다. 휴게소에도 들러 이것저것 사 먹고 웃고 즐기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표지판에 양양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처음 출발할 때에 비해 차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네비가 빠질 준비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네비에는 계속 직진이었다. 뭐지? 동호해변 가는 길은 좀 다른가? 그때쯤 뒷좌석에서 김 총무가 'X 됐다.'라고 나지막이 뱉었다. '뭐!?' 모두의 관심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야... 나 숙소를 속초로 예약했어...' 그녀의 말에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왜 네비가 양양으로 빠지라고 말하지 않는지. 출발할 때 숙소 주소를 찍었는데, 그때 주소가 속초시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처음부터 속초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어떻게 양양 코 앞에서 깨달을 수 있는지!
김 총무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숙소를 취소하고 다시 예약하려 했으나, 당일 취소가 어디 쉬운가. 환불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야, 그냥 가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바다는커녕 이상한 도로의 한 복판에 있는 곳이었다. 이런 데 숙소가 있구나.. 하는 위치. (김 총무는 나중에 다른 친구와 동호해변 앞 숙소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온 바람에 우리 모두의 지탄을 받았다. 2주 정도 만날 때마다 그녀는 무릎을 꿇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꿇지는 않았다.) 숙소에 짐을 내려두는 동안 강원도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욱식님과 차름언니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동호해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속초로 달려온..) 나는 해물탕에 소주를 먹어야 했기에, 우리가 타고 온 차는 숙소에 두고 욱식님의 차를 얻어 탔다.
실컷 바다를 봤다. 전망대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맛있는 음료도 마셨다. (원래는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할 거 하자고 약속했었지만 모두가 예상했듯 아무도 뭘 가져오지 않았기에, 아주 당연하게 수다를 떨었다.) 부산 사람인데도 바다 보는 게 어쩜 질리지도 않는지. 다 함께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며 시간을 보냈다. 맛집 검색은 구글 지도가 가장 정확하기에 맛있는 해물탕 집을 찾아 구글링을 했다. 가까운 곳에 꽤 괜찮아 보이는 집이 있어서 들어갔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해물탕 맛은 기가 막혔다. 소주만 먹기에는 너무 써서, 소맥을 말았다. 타지에서 먹는 해물탕과 소맥이라니! 그 맛에 그 주의 온갖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해물탕을 먹으며 알딸딸하게 취한 우리는 근처 호수 공원을 걸으러 갔다. (욱식님은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대리 부르자고 모두가 꼬셨는데도 그는 정말 대단해..) 호수공원은 시원하고 반짝거려서 산책하기에 딱 좋은 코스였다. 그러나 체력이라고는 없는 몇몇 친구들이 힘듦을 호소하여 산책은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되었다. 다시 차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놀이터를 발견했다. 요즘 놀이터는 어찌나 재밌는 것들이 많던지... 술 취한 사람들처럼 (안 취했다고는 못하겠지만...) 깔깔대며 놀이터에서 놀았다. 차례대로 미끄럼틀을 타고 뛰어다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동영상이 아직도 웃음을 주고 있으니 만족스럽다.
그리고는 갑자기 딸기 음료가 먹고 싶다며 카페를 들어갔다. 이것저것 시키고 앉아서 욱식님과 차름언니가 준비해온 보드게임을 했다. 카드 게임이었는데, 왕과 노예가 정해지는 게임이었다. 거의 대부분 내가 왕이었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지만, 내 주사는 자는 것이기에 졸음과 싸워야 했다. 얼마간 게임을 하고서 모두가 음료를 비웠을 때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몇 시간 내내 운전을 하는 게 생각보다 고됐는지 숙소에 돌아와 뻗어버렸다. 초보자는 초보자인지라 핸들을 쥐었던 손목이 아파왔다. 핸들을 쥘 때는 가볍게 쥐라는데, 정신을 차리면 내가 팔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계속 가볍게 쥐려고 애썼으나 내 맘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차에서 못 잔 웅자도 함께 뻗었다. 우니와 김 총무는 둘이서 술을 더 먹겠다며 양주를 사 왔다. 대충 잠에 들며 들은 바로 별로 맛있었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여행 첫날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