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든 내 나이는 아직 어린 나이다. 무슨 노하우가 쌓여있거나 삶의 지식을 터득했거나 하는 멋진 나이는 확실히 아니다. 너무 어려서, 여전히 ‘아직 어린 게.’하고 비웃음을 사고 마는 그런 나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어린가 하면 또 그렇게 어리지는 않은 나이다. 상대의 편의에 따라 나는 ‘어른’이기도 하고 ‘아직 어린애’이기도 한 애매한 나이, 스물여섯. 4년제 대학을 다녔다고 가정하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 혹은 이미 시작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나이다. 그러나 나는 스물여섯인 올해, 쉬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건 어떤 큰 계기를 만나서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스스로가 너무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하나의 꿈을 좇은 나에게 쉴 시간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 영화를 배우던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동기들과 앉아 교수님께 ‘스토리텔링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받은 그 순간이 아직도 설레게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내내 부모님은 영화를 하고 싶다는 내 말을 흘려들으셨고, 수능을 치고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우울한 나날들을 보냈다. 힘들게 설득하고 (설득이라기보다는 아니면 죽어버리겠다에 가까운 수준이었던 것 같지만) 처음 들은 수업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교수님의 나긋한 목소리와 졸릴 만큼 따뜻한 강의실, 창문을 넘어 흐르던 햇빛 같은 것들까지도. 내가 정말 전공으로 영화를 시작하다니!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영화 제작의 프로세스를 다 배우기도 전에 열정으로 똘똘 뭉친 새내기들은 단편 영화를 찍겠다고 설쳤다. 연출은 나였다. 물론 좋은 작품이 나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다음 달은 친구가 연출하는 단편 영화의 스텝으로 참여했다. 아버지가 소개해주신 (소개해줬다가 호되게 혼나고 오면 영화를 포기하진 않을까 해서)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 영화 수업을 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진행한 수업은 정말 좋았다. 선생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 수업은 됐으니 시나리오를 쓰자고 했다. 그때쯤 반수와 상경을 꿈꾸던 내게, 선생님은 대학에 갈 필요가 없으니 장편 시나리오를 써서 데뷔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모종의 사건들로 장편 시나리오는 완성하지 못했고 당연히 나도 감독 데뷔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게 나를 달려 나가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만들고 싶은 장면들이 매일매일 샘솟던 시절이었다.
1년 다닌 학교를 휴학하고, 재수에 돌입했다. 서울 입시학원을 다니느라 서울과 부산을 오다니다가 시간과 금전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어 서울에서 먼저 자취를 하고 있던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고맙게도 친구가 월세나 다른 것들을 받지 않아서, 몸과 소량의 짐만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입시학원을 다니며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친구 집이 고대 근처여서 고대생은 아니지만 KU 시네마테크를 밥 먹듯이 갈 수 있었다. 텅 빈 영화관에 앉아 여러 영화들을 봤다. 거기서 상영하지 않는 영화들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서 보거나, 인터넷에서 구매해 봤다. 하루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3편씩 보고 매일 같이 시나리오를 쓰고 책을 읽는 생활을 했다. 수능 3개월 전에 수능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공부도 했다.
다행히 목표했던 대학 중 한 곳에 붙었다. 정들었던 이전 대학과는 작별을 하고, 새로운 대학에서 1학년부터 새로 시작했다. 입학하자마자 촬영장이 너무 가고 싶어서 선배의 단편 영화에 미술팀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이후에는 선배들의 졸업작품에 참여했다. 편집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싶어서 디지털 콘텐츠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큰 실수였다.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기는 하지만, 복수전공이라 졸업작품도 내야 했던 것이다. 연극영화학과와 디지털 콘텐츠학과의 졸업작품 두 개를 모두 마쳐야 졸업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연극영화학과 졸업작품은 2학년 때부터 조금씩 준비해놓았기에 만족스럽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콘텐츠학과가 원하는 졸업작품을 내놓기에 복수전공자인 나는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어떡하지, 복수전공을 포기하고 부전공으로 졸업할까? 그게 될까? 하고 골머리를 앓던 중에 좋은 사람을 만났다. 영상으로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영상 전공자고 자기는 게임을 전공하니, 함께 협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승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4학년 1학기, 학교 밖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학교가 전공 점수를 인정해주는 인턴쉽이었다.) 디지털 콘텐츠학과 졸업작품을 찍었다. 주중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외주로 편집하고, 주말에는 졸업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인턴이 끝나고서는 친한 친구들의 졸업작품에 스탭으로 들어가 일했다. 내내 이어지는 촬영과 몰아치는 편집, 졸업 사정회들로 정신이 없었다.
4학년 2학기, 나름대로 학교를 정말 즐겁게 다녔다. 다시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게 너무 즐거웠다. 좋아하던 교수님의 안식년이라 자주 뵙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전공 교수님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졸업작품 마무리에 열을 올렸다. 가장 친한 친구가 졸업작품을 찍는다고 해서 조연출로 도와주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정신을 차리니 본가의 사랑하는 늙은 개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집에 갈 시간은 없었다. 미친 듯이 달려 졸업 전시회와 졸업 작품 상영회를 끝냈다. 어쩐지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앉아서 찬찬히 고민하다가 알았다. 내가 너무너무 지쳐있구나. 여기서 더 달리면 안 되겠구나.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지쳐있었다. 요약해서 썼지만 매 촬영장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몇 가지는 내게,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다. 친한 친구들과도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행을 다녀온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소중한 사람들을 1순위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나? 엄마랑 연락한 지는 얼마나 되었지? 휴대폰을 켜보았다. 연락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전화를 걸 수 있는 친구가 딱 두 명. 카카오톡에 400명이 넘는 친구가 있는데, 내가 힘들어서 전화를 할 수 있는 친구는 딱 두 명이 있었다.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어가야겠다.
이후로도 쉬어가도 괜찮은 가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했다. 한 달 정도를 내리 고민만 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그래, 애매한 내 나이 스물여섯. 지금 쉬지 않으면 평생 다시는 쉬지 못할지도 모른다. 혹여나 미래에 다시 쉴 기회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건 스물여섯의 내가 아니니까. 부모님께는 최소한의 경제활동만 하며 쉬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오늘도 4대 보험이 되는 직장에 얼른 취직해야 하지 않겠냐고 잔소리를 하셨지만.) 친구들에게도 선언했다. 올해 많이 놀겠다고, 자주 만나 달라고. 현재의 나를 보듬어주고 계시는 우리 회사 대표님께도 (대표님과 나밖에 없는 회사지만) 말씀드려뒀다. 저 딱 일 년만 이 일할 것 같은데, 일 년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참 말도 안 되는 것들이긴 한데 어떻게 인복이 너무 좋아서 모두에게 이해를 받고 있다.
지금이 4월의 끝자락이니 1~3월은 요약해놓겠다.
1월. 4학년 1학기 회사 인턴과 외주로 모아놓은 돈 300만 원을 털어 엄마와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 다녀와서는 이사를 준비했다. 학교 앞 원룸 자취방에서, 서울 외곽의 투룸으로. 친오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2월. 이사를 완료했다. 이제 회사 촬영을 나가면 되는 거였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촬영들이 줄줄이 취소되어 강제 백수가 되었다. 같은 동네에 부산에서 이제 막 상경한 친구가 이사를 왔다. 집에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고, 친한 배우가 하는 연극을 구경 가고, 사촌 언니 결혼식에 참석했다.
3월. 부산에서 이제 막 상경한 친구와 같이 살다시피 하다가 ‘제주도 가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갑자기 다음 날 비행기 티켓을 끊고 출발했다. 장롱면허였던 친구와 작년 10월에 겨우 면허를 딴 내가 번갈아 운전을 하며 제주를 즐겼다. 비자림 근처에 숙소를 구한 건 신의 한 수! 서울로 돌아와야 하는 날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기는 뜰 수 있었지만) 홧김에 숙소를 연장했다. 일주일 내내 제주도에서 행복했다.
4월 끝자락부터, 올 한 해 내가 어떻게 쉬고 어떻게 마음을 채워나가는지 <, 쉼표>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해보려 한다. 이 귀중한 시간을 아무렇게나 흘려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굳이 뭔가를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딘지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은 하루마다 그 날의 기록을 남길 것이다. 혹여나 누군가 지치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거나, 잘 걸어가던 길이 눈 앞에서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이 기록이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 일주일에 최소 한 편에서 많게는 두 편까지 꾸준히 글을 쓰자.
- 수정해도 좋으니 강박을 갖지 않고 편하게 쓰자.
이렇게 두 가지의 목표가 있다. 혹여나 글이 수정되어도 놀라지 마시라. 어차피 귀차니즘에 잠식당한 내가 수정하는 것이라고는 자잘한 맞춤법과 몇몇 단어들 밖에 없을 테니. 어떤 분이 읽으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늘부터 <, 쉼표>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