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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Mar 13. 2022

잘 지내니?

문득 떠오른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신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27살의 나는 당시 학교와 교회만 오가는 삶이 너무 단조롭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분명 세상은 더 크고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을 테지만 내 시선은 계속 어느 한 곳에 머물러 고인 물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졸업은 해야 했기에 학점을 간신히 챙기고서 그 외의 시간에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소설과 더불어 다양한 에세이를 탐닉했으며, 처음으로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워 학교 앞마당 넓은 주차장에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연습을 했다. 그리고 때마침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영동세브란스 원목실의 어린이 병동 봉사자 구인광고는 내게 꽤 신선한 제안처럼 여겨졌다.


봉사라고 해야 고작 일주일에 하루, 몇 시간 정도 어린이 환우들에게 강아지(푸들), 토끼, 긴 칼, 모자 등 난이도 下의 만들기 쉬운 풍선아트를 하나씩 손에 쥐어주고 오는 일이었기에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에 수업을 비우고 병원으로 가서 먼저 원목님께 인사를 드린 후, 풍선을 주머니에 잔뜩 담아 병실을 돌면서 풍선을 만들어 나눠주던 봉사는 그 해 9월까지 대략 6개월 정도 지속하고 마무리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급식처럼 나오는 병원 밥이 저염식이라 너무 맛이 없었기에 그곳의 병원 관계자들이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다는 거. 그리고 8살의 어린 홍OO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음)가 꽤 오래 입원을 하고 있었기에 안면을 트고 난 후 "OO야 잘 지냈어?"라고 가벼운 인사를 건넸을 때 OO의 답이 꽤 큰 충격이었다. "밤에는 고통스러운데요, 그래도 낮에는 괜찮아요. 참을 만 해요." 대답을 듣고서 속으로 '이제 겨우 8살인 아이가 고통이라는 단어를 알아?' 순간 놀랐으나 이내 OO가 나보다 고통이라는 단어의 실제적인 뜻을 훨씬 더 잘 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얘기를 듣고서도 내가 그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풍선을 만들어 주는 일이 전부였으니까.




어쩌면 지나온 내 삶의 긴 여정 속에서 잊혔거나 혹은 기억 속 저 심연 어딘가에 묻혀 있을 법한 이 이야기는 얼마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 확 튀어 올라왔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을 위해 구인 광고를 올리고서 지원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던 중 한 청년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 곳에 면접을 보러 온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반응이 어떠셨어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거의 다 응원하고 지지해 주시는 편이세요. 그래서 면접 잘 보고 오라고 하셨어요" 다른 대화를 이어가던 중에 "제가 12살 때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병원에 한 3개월 정도.. 오랫동안 입원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때 거의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거라 그 이후로는 뭘 하던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그냥 하라고 하세요." 그러면서 그 병원이 나중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말을 했다. '응? 이름이 바뀌어?'


"혹시.. 어릴 때 어느 병원에 있었어요?"

"저는 영동세브란스에 있었어요"

"거기 강남세브란스로 이름 바뀌었잖아요"

"아 맞아요! 알고 계시네요!"

"나 거기서 대학생 때 봉사활동 했었는데..?"

"아 정말요? 저 보라색 푸들(강아지)하고 검정색이었나.. 긴 칼을 받고서 너무 좋아 바람이 빠질 때까지 가지고 있었어요"

"그 강아지하고 칼.. 내가 만들었는데..!"

"진짜요? 저 그 풍선 너무 좋아했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나요"


순간 머리 위에서부터 등을 타고 온 몸에 전기가 찌릿하며,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우와... 그게 언제라구요?"

"제가 12살 때니까 18년 전이네요"

"내가 45살이니까 18년 전이면 27살.. 나 대학교 4학년 때 3월부터 9월까지 어린이병동에서 봉사활동 했거든요"

"제가 5월부터 아마 8월까지 3개월 정도 있었을 거에요"

"와.. 진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쳤고, 그 후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청년과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그 감정에 깊이 함몰되어 한동안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수도 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많은 관계들 속에서 어떤 만남은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당시에는 그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기억이나 마음속 어딘가 깊은 곳에 흔적을 새겨 놓는다. 이 청년과의 대화 이후로 생긴 소소한 버릇 한 가지는.. 흘러간 인연이라 생각하고 한편으로 미뤄둔 누군가와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자연스럽게 꺼내보려 하는 점이다. 한때나마 친구로, 선후배로 지내며 서로 웃고 떠들고 즐거웠던 기억이 한두가지는 꼭 있을 테니까. 그 누군가를 향한 아픔이나 미움들이 조금은 옅어지고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가는 것. 어쩌면 나이 들어감의 최고의 좋은 점이지 않을까.


이십대 초반, 브로맨스를 즐기던 나와 DH. 잘 지내지?


 https://youtu.be/8T85qOL1AOY

그러려니. 선우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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