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티브이에서 많은 연예인들이 그리도 고통 받고 힘들어한다는 공황장애가 연예인도 아닌 평범한 나에게 왜 생겨난 것일까? 그 동안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며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진단적 증상들이 내 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연예인들은 대중 속에 비춰지는 삶에서의 스트레스가 과도하여 공황이 생길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해 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연예인이 아닌 대학의 교수이다. 나는 아주 평범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도 공황은 갑작스런 쓰나미처럼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는 병이란 걸 알게 되었다.
힘겨움의 시작은 서서히 나의 삶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공황장애는 불안장애의 한 종류이다. 그렇다면 연예인을 비롯한 우리들은 왜 불안이 발생되는 것일까? 그리고 불안 앞에서 우리는 왜 그리도 취약한 것일까?
인간에게 ‘통증’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신호이다. 아픈 신호를 감지해야 대처할 수 있고, 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안 역시 그러하다. 우리의 생명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생존’을 위해 뇌가 필사적으로 반응하게 되어있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형성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사랑 받기를 기대한다. 즉, 태아는 자신의 신체기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마음’이라고 감정의 반응이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사랑을 통해 인간 스스로 생존방법을 배워가는 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고 영, 유아기를 거치며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타인에 대한 신뢰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마음의 상처 회복력 또한 긍정적이다. 하지만 반대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의 경우 부정적 정서와 심리적 왜곡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은 긍정적 정서보다는 부정적인 정서를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긍정적 감정은 당연하게 여기거나 쉽게 지나치는 반면, 부정적인 감정은 마음속에 쌓이고 쌓여 결국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선행적 경험을 통해 남겨진 트라우마는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다.
뇌의 기억회로에 저장되어 언젠가는 폭발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다.
옛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대해 어릴 적 경험이 나에게 가져다 준 공포에 대해 말하고 싶다.
초등학교 3학년쯤 무렵이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큰집에 놀러갔다가 사촌언니들과 들길을 지나는데 수 백 마리의 메뚜기 떼가 순식간에 내 몸 주변을 둘러싸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달려들은 경험이 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곤충에 대한 공포(phobia)를 가지고 살아왔다. 더듬이가 있고 다리가 얇으며 날개가 있어 언제라도 나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곤충들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공포감을 느낀다.
곤충만이 이런 트라우마를 남기는 걸까? 사회 안에서 사람들하고의 관계, 가정 안에서 만들어진 상처들...
세세한 경험과 기억들이 나를 더욱 민감하게 하고, 유사한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악순환적 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연예인들이 유독 공황장애가 더 많은 이유는 대중들의 시선과 노출에 의해 다양한 가면을 써야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사생활에 대한 부분도 대중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 어려움도 한 몫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연예인은 아니지만 나 역시 공인이다. 학생들 앞에 서야하는 교수자로서 또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교육자가 갖춰야하는 이미지 역시 공황을 유발시킨 요인 중 하나이다.
사회라는 구조적 틀과 조직이라는 위계적 질서 안에서 나는 진실을 외면해야했고, 정의를 부르짖을 수 없었다. 그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내 마음을 병들게 했다. 사회는 안정적인 흐름을 좋아한다. 조직역시 그렇다. 그래서 가끔은 진실이 거짓이 되고, 약자는 그렇게 멍이 들어 마음에 상처와 흉터를 남긴다.
나 역시 가면을 써야했다. 수업을 할 때면 아무 일 없는 듯 웃으며 학생들을 마주해야 했다. 직장 내에서 동료 교수님들과 마주칠 때 역시 애써 미소 지어야 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가면을 벗고 힘든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함께 사는 가족은 얼마나 힘들게 심적 고충을 느꼈을까?
그렇게 3,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온 시간만큼이나 마음 속의 상처는 더욱 곪은 듯 했다. 내 안에 내가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더 이상 가면을 쓸 만큼의 기력도 없어졌다. 마치 벼랑 끝에 서있는 위태로운 내 모습을 바라보는 듯 했다. 세상을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이 힘들었다. 내 마음의 아픔들을 외면하고 덮어 둔 결과였다. 그런 시간들이 반복되어 오며 더욱 상처가 커져만 갔고, 더 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선생님은 입원을 권유했다. 나 역시 세상으로부터의 쉼이 필요했다. 그렇게 처음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을 했다. 모든 게 낯설었다. 핸드폰은 당연히 소지할 수 없었고, 볼펜도 자살위험이 있다고 하여 싸인펜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책은 세 권까지만 허용되었다. 처음엔 이런 규제들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담당 레지던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건네셨다.
“환자분~ 좀 답답하다고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이유이니 편안한 마음 가지시면 될 것 같아요.”
나는 모든 것을 편안히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자발적인 입원이었기 때문에 퇴원은 언제라도 내가 원할 때 즉시 가능한 상황이었다. 입원 후 며칠을 안정된 상태로 보내고 다시 통원치료를 시작했다.
퇴원 후 집에 돌아와 얼마동안은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입원하여 집중 치료한 효과가 이렇게 나타나는구나!’라고 안도의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며 다시 불안감과 함께 공황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일상이라고 하는 생활 속에 노출되다 보니 잠재된 상처와 시시때때로 요동치는 두려움은 나를 무기력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인기피와 부정적 자아감은 커져만 갔다.
상태가 심각해져가는 가운데 나는 궁지에 몰린 작은 생쥐가 된 듯 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나에게 생존본능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아픈 건 나의 잘못이 아니야.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아픔을 끌어안고 바보처럼 굴래?”
내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였다.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싶었다. 어두운 아픔에 갇히어 시간을 소비하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살아야 했다. 아니 살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멋지게 다시 비상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