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르기 비염부터 채링크로스 84번지까지
#1
시작은 알레르기 비염이었다. 어릴 때는 사계절 내내 기상하고부터 해가 높이 뜨기 전까지 재채기를 하느라 오전이면 정신이 없었다. 코를 하도 풀어서 코밑이 헐거나 재채기를 너무 세게 많이 한 날이면 머리가 아프곤 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의 지독한 화장품 냄새나 담배 연기로 인해 재채기를 몇 번 하거나 환절기마다 예전과 같은 증상으로 머리가 띵한 오전을 보내긴 했지만.
결혼을 하고 코로나가 막 심해지던 시기, 나는 아직 운전실력이 미흡해 버스로 출퇴근을 했다. 마스크를 사려면 줄을 서야 했고 온갖 공포스러운 소식으로 서로를 지나치게 경계하던 때, 열도 없고 몸살도 없이 마른기침이 마구 나왔다. 콧물이나 가래도 없었다. 멀쩡히 있다가 어느 순간 목이 간질간질하면서 기침만 나오는 것이었다. 막 결혼을 하고 출퇴근 시간이 더 길어져서 편도 1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야 했다. 아무렇지 않다가 하필 버스 안에서 기침이 요란하게 났다.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가까이 앉아있던 사람들은 다른 자리로 피했다. 동네 병원에 가서 감기약을 처방받고 약을 먹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검색을 하니 관덕정 건너편에 위치한 내과에서 기관지 관련 치료를 잘한다고 소문이 나있었다. 회사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여서 얼른 가보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 등에 청진기를 대보자마자 비염 증상이라고 했다. 특유의 숨소리가 느껴진다며 약을 처방해주었고 그 약을 먹고 다음날부터 거짓말처럼 기침이 멈췄다. 동시에 남편에게서 자존심을 구기며 운전을 배워 그때부터 차로 출퇴근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 여기까지 2020년 3월의 일이다.
그 후로 같은 해 가을과 작년(2021년) 봄, 그리고 또 작년 가을에 같은 이유로 병원을 찾아갔다.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조금만 괜찮아지면 금세 잊고 지냈다. 그리고 올해 봄은 어쩐 일인지 아무 증상 없이 잘 지나갔는데 보름 전쯤부터 다시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 2주 연속 주말마다 육지에 다녀와야 했다. 다른 때보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기침이 쉴 새 없이 나와 곤욕스러웠다.
그저께 7일이 입동이었다. 절기상 겨울이 시작되었지만 봄날처럼 따뜻한 요즘, 여전히 환절기다. 점심시간 전후로 병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진료를 받으려면 최소한 20분을 기다려야 했는데 오늘따라 기다림 없이 진료를 받았다. 역시나 알레르기 비염의 숨소리라며 약을 처방받았다. 진료를 받고 처방약을 받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덕에 평소 손님이 많아 가보지 못했던 식당에 가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2
닭칼국수와 들깨 닭칼국수, 들깨수제비와 누룽지죽. 네 가지 메뉴 모두 한상차림으로 나온다고 되어있었다. 보리밥과 생선구이, 그리고 여러 반찬이 나오는데 오늘의 생선은 갈치였다. 음식이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는 걸로 보답(?)하고 싶었지만 나에겐 양이 너무 많았다. 남들은 앉은자리에서 많은 양의 음식을 어찌 그리 잘 먹는지 부러울 따름이었다. 결국은 반 정도를 겨우 먹고 나서는데 귤이 보였다. 귤이 한창 나올 때가 되었구나, 반가운 마음에 부른 배를 잊고 귤을 챙겼다.
#3
밥을 다 먹어도 12시 반이 되지 않았다. 관덕정 건너편, 그러니까 병원 뒤편에 있는 책방에 갔다. 원래는 '미래책방'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후북스'로 바뀐 곳이었다. '미래책방'이었을 때 사장님이 부산 사람이어서 참 반가웠는데. 책방에서 책방이 된 곳이어서 이전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의 <사진의 용도>와 김져니의 <14번가의 행복>을 구매했다.
#3-1
아니 에르노를 처음 읽은 건 <단순한 열정>이었다. 결혼하기 전 남편과 대평리 어느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읽은 책이다. 낮에는 카페, 밤에는 맥주집이 되는 곳이었다. 그때 안주로 고추장아찌에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 주었는데 매콤하고 바삭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나중에 찾아가니 스쿠버다이빙, 서핑 등을 체험하는 장소로 바뀌어 아쉬웠다. 버드와이저를 병째로 마시며 단숨에 읽은 뒤로 유람위드북스에서 한번 더 읽고 그녀의 다른 책들도 몇 권 더 읽었다. 여기저기서 인상 깊게 읽어서인지 당연히 그녀의 책이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전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찾아보니 한 권도 없었다.
#3-2
장 자끄 상뻬의 그림과 철학을 매우 좋아한다. 올해 세상을 떠난 그를 추억하던 중 그의 그림체와 다른 듯 닮은 그림을 보았다. 심지어 글도 함께였는데 따뜻하고 행복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녀의 책 중 <폴라리또와 나>를 구매하고 싶었지만 책방에 남은 두 권 모두 책 모서리가 찍히거나 구겨져있어 다음을 기약하며 <14번가의 행복>을 구매했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가 떠올라서였다.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렌이 절판된 책(희귀 고서적)을 구하기 위해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마크스 서점의 프랭크에게 편지를 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실제로 작가가 서점의 직원들과 프랭크를 비롯해 그의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다. <채링크로스 84번지>와 <14번가의 행복> 두 권의 표지 색(녹색)도 비슷하다. 책의 표지를 보자마자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읽은 서점의 모습이 그려지고 책 속의 우정과 낭만이 느껴졌다. 같은 제목과 내용의 영화(우리나라 번역 제목은 '84번가의 연인'이어서 매우 의아했던)도 재밌게 봤는데 생각난 김에 저녁을 먹으며 다시 봤다.
#4
책방에서 나오면 바로 왼편에 보이는 세탁소가 있었다. 올해 초까지도 영업을 하던 곳이었는데 이젠 다른 공간이 되었다. 간판이 따로 없어 뭐하는 곳일까 하며 지나다니다 오늘 지도로 확인하니 카페였다. 심지어 케맥스로 추출하는 브루잉 커피라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섰다. 브루잉 커피가 가능한 원두는 따로 향을 맡을 수 있게 해 두었고 나는 아이덴티티커피랩의 '에티오피아 반고 고티티 무산소 내추럴'을 골랐다. (다음엔 모모스커피의 '파나마 CCD 다이나믹 체리'를 마셔야지.) 커피 도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케맥스 필터로 커피를 내리면 커피가 한결 부드럽고 깔끔하다는 것만 알고 있다. 역시나 부드럽고 깔끔하고 에티오피아 특유의 향과 산미가 느껴져 행복했다.
원래 자리를 지키던 세탁소는 무려 45년 동안 운영되었다고 한다. 군데군데 세탁소의 모습을 남겨두고 리모델링한 카페를 둘러보다 예전에 찍어둔 세탁소의 사진이 떠올라 앨범에서 찾아보았다. 사장님께 허락을 구하고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소심한 탓에 차마 그러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5
30년 넘게 달고 사는 알레르기 비염, 1940년에 태어난 아니 에르노와 1932년에 태어난 장 자끄 상뻬의 글과 그림, 1949년부터 1969년까지 뉴욕과 런던을 오고 간 편지들, 1986년에 만들어진 영화, 45년 동안 운영되었던 세탁소. 하루를 돌아보니 오늘 만난 오래된 것들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사람은 태어나 죽고 건물은 지어져 사라진다. 하지만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오래되어 낡은 저마다의 모습이 아름다울 때, 나는 잘 늙어가고 있는지 생각한다.
시작은 알레르기 비염이었고, 그로 인해 사무실을 벗어나 두 시간 반 동안 얼마나 알찬 시간을 보냈는지 쓰려던 것이 이렇게 되었다. 아주 짧지만 알뜰한 여행 같은 시간이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