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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Feb 29. 2024

제주에서의 아침 그리고 저녁

동쪽 끝마을 종달리에서

연초에 부서 이동이 있었다. 부서 이동, 이라는 네 글자에 대상자인 나뿐만 아니라 이리도 많은 사람의 의견과 의지와 고민이 들어있을 줄이야.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다 보니 마음이 지쳤고, 새로운 업무와 팀원에 적응하느라 몸이 지쳤다.


하지만 사람은 직접 겪어보라 했던가. 무수한 풍문의 주인공이었던 팀장은 생각보다 합리적인 면모가 있고, 팀원들은 유능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업무는 더럽게 재미없지만 가뭄에 콩 나듯 흥미로운 순간도 더러 있다. 사회생활 6년 차로 접어드니 사무실에서 느끼는 체념과 절망(?)은 몸에 밴 듯 익숙해졌고 아직까지는 불합리한 일에 분노할 수 있는 나의 체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홧김에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혼자 여행은 거의 7년 만이다. 2박 3일간, 품이 넓은 제주의 하늘에 부정적인 찌꺼기를 풀고 싶어 걷고 또 걸었다.


동쪽 끝마을 종달리는 혼자 여행하는 이들의 성지였고, 그래서인지 카페, 음식점, 숙소마다 정성스러운 글씨로 빼곡히 적힌 방명록을 읽어볼 수 있었다. 회사 때려치운 사람, 연인과 헤어진 사람, 군대를 갓 전역한 사람, 가부장적인 시댁에 지쳐 떠밀려온 사람. 자식들을 번듯이 키워내고 생에 처음으로 혼자 제주로 온 어머니. 그저 신난 아이들. 사람들, 사람들. 닮은 듯 다른 각자의 고민이 이곳에 고요히 산재해 있다. 몇몇 회사 사람들 꼴 보기 싫어서 떠난 여행인데 결국은 사람으로 위로받는다.

최근 욘 포세 작가의 <아침 그리고 저녁>이라는 책을 읽었다. 2년 전인가, 엄마가 극찬을 해서 집어 들었다가 조용히 내려놨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작가님은 무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셨다.) 심기일전하고 책을 펼쳤는데 출근길 지하철에서 눈물이 찔끔 나고 말았다. 한 남자의 탄생부터 죽음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문체 안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욘 포세의 고향인 노르웨이를 가본 적은 없지만, 북유럽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웅장하고 푸르른 대자연의 풍경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뽕을 뽑고 말겠다는 의지로 아침 7시에 일어나 하루 죙일 종달리를 휘젓고 다녔는데, 지미봉 등산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160m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만 오름의 경사는 어마어마했고 운동 부족으로 연약한 다리는 후덜후덜 떨렸다. 올라가는 내내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조금 무서웠다. (각종 살인, 납치, 범죄 영화를 떠올리기 시작함)

헉헉 대며 정상에 도착했고 온통 하늘과 바다로 둘러싸인 360도 파노라마 풍경에 넋을 놓았다. 재빨리 이어폰을 꽂고 최유리의 음악을 재생했다. 정상에 오롯이 홀로 있던 약 15분의 시간 동안 행복, 이라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 자연스레 욘 포세의 소설이 떠올랐고, 노르웨이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인생사의 삶과 죽음을 골똘히 생각하는 예술가의 굽은 등을 생각했다.


그렇게 혼자 훌쩍거리며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가운데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비속어를 섞은 고함을 지르며 정상에 다다랐다. 아이들은 풍경은 쳐다보지도 않고 털썩 드러누워 유튜브 쇼츠를 큰 소리로 재생했다. 흥은 그렇게 심심하게 사라졌다.

내내 흐린 하늘만 잔뜩 보여주더니 일몰 시간이 다 되었을 즈음 선명한 해가 나왔다. 서울에서는 높은 빌딩에 가려 늘 멀게만 보이는 하늘이 이곳에서는 손 닿을 듯 가깝다. 바로 그 점이 제주의 낭만이고, 지칠 대로 지친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치트키다.


이번 여행기를 회사 점심시간, 근처 카페에서 후다닥 쓰고 있다. 짧은 일탈을 마치고 돌아온 회사는 여전히 똑같고, 메일함은 넘쳐나고, 여전히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넘쳐난다.


그래도 때로는, 너무너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제주에서의 아침 그리고 저녁이 틈입하는 순간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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