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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Nov 09. 2023

기자들은 왜 술을 마시나


입사 후 첫 저녁 자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사장과 수습들이 삼겹살(매우 소탈하신 부분^^)을 먹었다. 나는 언론사 입사를 준비할 때부터 선배들로부터 술에 대한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기자는 일상이 술이라는 것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친구는 없었어도 소소한 음주를 혼자라도 즐겨왔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자도 직장인이고, 회식은 모든 직장인이 하는 건데 별일이야 있겠어, 싶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착각했다. 사장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완벽하게 만취했다. 동기들에게 들어보니 울고불고 난리를 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근처 길바닥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뭐 이런 민폐가.. 그것은 내 불쌍한 음주 인생의 서막이었다. 맛있는 안주와 함께 소소히 즐기던 내 음주라이프가 이제 건강이 나빠지는걸 온몸으로 체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그런 일종의 의식 같은 게 됐다.


좀 신기했던 것은 기자들은 꼭 소맥(소주+맥주)을 타 먹었다. 소주잔 두 개를 포개서 아랫잔이 윗잔과 겹쳐지는 부분까지 소주를 따르고, 그 소주를 맥주잔에 넣고, 맥주를 2/3 정도까지 채운다. 병권자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소맥을 제조하는 사람이다. 술자리 인원이 열명이 넘으면 배달도 중요하다. 각자 잔을 제대로 돌려야 하는 것이다.


한 선배에게 왜 굳이 소맥을 먹느냐고 했다. 맥주를 많이 마시면 건강에도 안 좋고, 소변도 자주 보고, 통풍 위험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수십 명에게 말했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인생은 쓴데, 소주만 마시면 더 쓰니까 맥주와의 희석을 통해 보다 더 부드러운 술이라도 마시면서 인생을 부드럽게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입사 초기에는 양주가 대세였다. 선배들은 저녁 자리에 쇼핑백을 들고 왔다. 소중히 포장을 뜯으면 발렌타인이나 조니워커 등이 있었다. 나는 이 쓴 양주를 도대체 왜 먹는지, 또 귀한 양주를 왜 굳이 맥주에 타서 양맥을 만들어 먹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전히 그렇다. 양맥을 먹은 다음날은 꼭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이 뒤틀렸다. 역시 소맥이 최고인 것 같다 ^^


언론사에는 주당이 참 많았다. 앉은자리에서 소주를 궤짝으로 먹었다더라, 1차 소주 2차 양주 3차 위스키 4차 와인으로 달렸다더라, 하는 괴소문이 풍문처럼 떠돌았다. 실제로 한참 선배들 가운데는 술을 낙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기사를 찾고, 발제하고, 쓰고, 고치고 하면서 드는 미친듯한 스트레스를 그 한잔으로 푸는 그분들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마감을 딱 하면 시원한 맥주 한잔이나 소맥 한잔이 떠오른다. 10년 넘게 그들과 함께 하면서 나도 어느새 그들의 붉은빛 얼굴을 닮아가는 것 같다.


취재원 중에서는 주당이 더 많았다. 초년병 시절 나는 모 경찰서 강력 2팀 형사들과 친했는데, 그들의 당직 근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간단하게 한잔 하기도 했다. 그들은 조폭을 때려잡는 경찰이었는데, 생긴 것은 조폭보다 더 조폭처럼 생겼다. 술도 조폭처럼 마셨다. 한 번은 그들 중 한 명이 "기자들도 옛날 같지 않다던데" 하면서 도발을 해서 본의 아니게 대결처럼 됐다. 친친주라고 해서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사이다를 조금 섞는 술을 연거푸 5잔을 마셨고 결국 나는 승리했다. 하지만 집에 와서 토하고 쓰러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 미련했을까 싶다가도 별거도 아닌 걸로 자존심을 부린 게 생각나면 괜히 웃음이 난다.


부동산 출입 당시 건설사 형님들은 참 강했다. 현장에서 인부들과 동고동락하며 거칠게 지내던 그 가닥이 어디 가지 않았다. 청와대로 옮겼을 때도, 국회 때도, 세종에 내려와서 만난 기재부와 산업부 공무원들도 다르지 않다. 일반인이 보면 놀랄 정도로 다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계속 느낀 건데, 기자들이 술을 많이 먹는 것은 맨날 만나고 대화해야 할 취재원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굳이 혼자 기분내고 하는 게 아니고 상대를 맞춰가려다 보니 자연스레 주량이 늘어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처음 사람을 만나면 어색하니 술이라는 윤활제를 통해 금방 더 친해질 수 있다. 한 검사는 "나는 사람을 많이 보지 않는데, 그래도 저녁을 같이 하며 술을 나눈 사람은 다르게 보인다. 한 차원 가까워진 것 같다"라고 했다. 많은 취재원들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이를 공유하고 때론 덮어주며, 마음속의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사이의 기자를 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술자리는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정치부의 종특인데, 술을 마시며 했던 대화내용을 복기해야 되기 때문이다. 베테랑 선배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기억하기 때문에 쑥쑥 잘도 기억을 꺼내던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친해지기 위해서 함께 술을 마시는데, 그 사이에도 신경을 어느 정도 곤두세워야 한다. 고달프다.



술자리가 없으면 위기감이 느껴지는 시절이 있었다. 나만 빼고 타사 기자들이 유수한 정부 관계자를 만나서 국정 운영에 대한 내밀한 정보를 듣고 있진 않을까. 그러면 무리해서 약속을 잡게 된다. 월~금까지 저녁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을 마시던 때도 있었다. 위염을 비롯한 각종 질병은 늘어나고, 하루하루 몸이 나빠지는 게 체감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약속을 잡고 사람을 본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술을 먹는 게 아니고 술이 나를 먹는 것 같다. 나뿐 아니라 내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람도 이미 약속 장소에 왔을 때부터 얼굴이 불콰하다. 어제도 술을 마신 것이다. 술이 즐거움이 아니고 의무이자 과제가 된 것이다. 술 한 모금 더 마신다고 내가 일을 더 잘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요새 나의 주된 고민거리다.


요새는 술을 안 먹고도 기자생활을 잘하는 대단한 기자들이 많다. 술자리에서 대단한 정보가 나오지도 않는 세상이 됐다. 술 취해서 실수하는 취재원의 말 한마디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런 시대도 아니다. 다만 술로서 금방 친해지는 관계를 피해 더 열심히 사람을 만나고, 전화를 더 돌리는 젊은 기자들이 곧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것 같다. 그런 친구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면서.. 오늘 저녁은 삼겹살에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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