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 지방자치단체 쪽 국장급 공무원이랑 통화를 하는데 대뜸 "제가 지금 얘기하는 건 엠바고 입니다. 쓰시면 안 돼요"라고 했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엠바고까지 걸었다고? 기관도 아니고 일개 개인이? 좀 황당해서 다시 물어보니 그는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전제로 얘기해주는 것)랑 엠바고를 헷갈린 거였다. 요새는 이런일은 흔하다. 그냥 언론 용어를 마구잡이로 섞어서 던지고선 기자가 알아듣지 못하면 답답해한다.
기자 초년생때는 엠바고라는 용어를 쓰는게 좋았다. 멋있어 보였다. "그 보도자료 엠바고가 언제에요?" "지금 과장님이 맡은 사건 엠바고 언제로 잡으실 거에요?" 할때마다 아, 내가 진정한 프로세계에 발을 들여놨구나 하는 감격을 느꼈다. 11년째 기자질을 하고 있는 지금은 좀 느낌이 달라졌다. 엠바고를 거는 것은 정보를 갖고 있는 쪽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이를 조정한다. 배경이나 이유가 어찌됐든 엠바고는 기자와 언론을 통제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들은 엠바고가 무슨 성역인 줄 안다. 기자로서도 엠바고는 편한 측면이 있다. 큰 사안을 두고 정부가 엠바고를 걸면 풀리는 시점까지는 기사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엠바고(embargo)란 '보도 시점 유예' 또는 '시한부 보도 중지'라는 저널리즘 관행을 뜻한다. 즉 보도에서 언론이 취재원과 합의해 언제 보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는 엠바고의 유래는 스페인어 '엠바고(embargar)'에서 왔다고 한다. 원래는 선박 용어다. 전통적인 국제법 하에서는 평시에 복구의 수단으로 실행되는 외국선박에 대한 항내 억류를 의미했다. 이후 1930년대 부터는 특정국가와의 화물의 수출입과 자본거래, 무역거래의 제한 등을 포함한 일반적 용어로 쓰였다. 그러나 자연스레 언론용어로 정착됐다는데 정확한 어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의 출입처 개념이 그대로 이식된 우리나라 언론계에서 엠바고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실제로 일해보니 더 그렇다. 일단 정부부처는 매주 금요일에 다음주 보도자료 배포 계획을 기자들에게 뿌린다. 보통 조간용, 석간용으로 나뉘어 있다. 조간용은 신문지면 기준으로 다음날 조간에 넣을 수 있는 기사라는 뜻이다. 석간용은 문화일보나 헤럴드 경제처럼 오후에 나오는 석간 신문에 실리는 자료를 가리킨다. 보통 각 부처가 진행하는 행사나 회의 시간 등에 따라 엠바고가 정해진다.
매우 큰 발표의 경우 기자들이 사전에 기사를 준비할 시간을 주고, 출혈 경쟁을 막기 위해 엠바고가 정례화 돼 있다. 기획재정부를 예로 들어보자. 매년 기재부의 가장 큰 행사는 경제정책방향(상, 하반기)와 예산안, 세제 개편안 발표 등 3개다. 세 발표 모두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매우매우 중요한 정책 발표다. 그러니 시즌만 되면 정부가 내년 예산안에 뭐를 넣고 뭐를 빼고, 어떤 세금을 더 늘리고 하는 식의 단독과 전망이 쏟아진다. 국민 혼란도 커진다. 그러니 정부는 미리 간단한 발표 내용을 알려주고 엠바고를 건다. 이후 실제 자료를 기자들에게만 뿌리고 엠바고 해제 시점에 맞춰 공식 브리핑과 회의를 열고 각 정책을 발표한다. 이 경우는 기자들도 무의미한 경쟁을 하지 않고 차분히 기사 야마를 고민할 수 있어 긍정적인 엠바고라 할 수도 있겠다.
긴박한 외교사안이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을 때도 엠바고가 걸린다. 가령 호르무즈 해협에서 우리 국민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고 가정해보자. 외교부는 바로 소식을 접하지만, 기사가 섣불리 나가면 우리 국민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 해적들이 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밑에서 최대한 해적과 협상하면서 미리 이런 사실을 언론에 알리고 보도유예를 요청한다.
대통령 순방의 경우에도 미리 다른 국가 정상과의 만남이나 회담 자료를 배포하고 실제 행사가 끝난뒤 보도하도록 엠바고를 건다. 대통령실은 특히 엠바고가 엄격하다. 청와대 출입할 때 어려웠던 것이 경호엠바고였다. 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에 삼청동 청와대는 부지가 매우 넓었다. 행사도 청와대 내부에서 하는게 있고, 밖으로 나가는게 있었다. 이때 대통령 경호가 중요했다. 만약 대통령이 지방에서 행사를 한다고 치면 그전에 기사가 나갈 경우, 반대하는 이가 미리 찾아가서 테러를 계획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외부 행사는 종료 전까지 미리 쓸수 없도록 엠바고가 걸렸다. 미리 일정을 알려주되, 보도 시점 유예를 요청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 차례 엠바고를 깬 적이 있다. 순전히 실수였다. 날짜를 헷갈려 미리 풀된 기사를 잘못 올린 것이다. 엠바고는 일단 기자단에 가입된 매체들이 한 약속이기에, 기자단의 일원으로서 이를 위반한 책임은 져야 한다. 그러면 기자단 차원에서 논의를 한다. 청와대의 경우 엠바고 파기가 너무 민감해서 출입정지 등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와대가 정하는게 아니고, 청와대 출입 기자단에서 논의해서 징계 수위를 조정하게 된다. 명백한 실수일 경우 그냥 경고가 주어지거나 간식형(피자나 햄버거 등을 전 매체에게 돌리는 것) 등이 주어진다. 다만 너무나 큰 사안을 미리 보도하거나 엠바고라는 걸 알고도 깬 경우, 소명이 미진한 경우에는 출입정지가 가해지기도 한다. 출입을 정지당하면 기자실 출입이 금지되고, 보도자료도 받지 못한다. 공식이나 비공식 브리핑 참여도 어렵다. 뒤에서 알음알음 자료를 받을 순 있겠지만 신뢰가지 않은 언론, 믿을 수 없는 기자라는 인식이 퍼지면 돌이키기 힘들다. 그러니 다들 엠바고를 열심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조심하는 것이다.
반면 단독으로 취재하던 사안에 갑자기 엠바고를 거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기자단 간사에게 얘기해서 엠바고를 받지 못하겠다고 하면 된다. 이런 양아치 스러운 사례도 많이 봤다. 다 취재를 하고 최종적으로 크로스체크를 하기 위해 홍보라인이나 대변인에게 전화했는데 갑자기 엠바고를 걸거나 취재한 내용을 자료로 바로 뿌려버리는 경우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상도의 없는 행동을 한 관료나 취재원중에 지금껏 잘된 케이스를 본 적이 없다.
다만 가끔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엠바고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처음엔 취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단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누구는 카르텔이라고 욕하겠지만 결국에는 각 권력기관에 유리한 구조다. 기자단을 만들고, 소속 기자만 잘 관리하면 부정적 기사는 최소화하고 좋은 기사를 최대한 어필할 수 있다. 비 기자단에겐 취재 응대를 안하고, 기자단 가입시에도 기존 매체의 투표 등이 필요하다. 이런 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권력 기관이 기자단에 엠바고를 요구하면 대부분 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취재원들은 최대한 이해를 구하지만 결국 엠바고는 각 기관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사 보도 시점을 조정하는 것이 된다.
기자를 위한 측면도 있겠다. 앞서 얘기한 예산안처럼 중요한 사안에 엠바고가 걸리지 않았을 경우 미친듯한 취재 경쟁이 이뤄질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너무나 많이 겪어서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윤석열정부가 들어서기 직전 인수위때는 엠바고가 없었다. 그냥 모두가 단독을 위해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하루에 100개가 넘는 단독같지 않은 단독이 쏟아진 날도 있었다. 성완종 리스트 때도 그랬다. 수사 상황이라 제대로 엠바고를 걸수도 없고, 유력매체를 중심으로 단독기사가 연일 쇄도했다. 그중에 90%는 나중에 오보로 밝혀졌지만.. 아무튼 정보를 미리 기자단에 주고 보도 시점을 조정하는 것은 기자단에게도 편한 일이다. 그러니 엠바고는 권력기관과 기자들이 서로 윈윈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근데 요즘은 좀 심한 것 같다. 이것저것 민감한 건 알겠는데 걸지 않아도 될만한 사소한 것들까지 다 엠바고를 거는 것 같다. 엠바고는 기관이 공식적으로 출입 기자단에 거는 건데, 요새는 취재원 개인이 거들먹대며 이거는 엠바고인거 아시죠? 라며 개인적으로 보도 시점을 통제하려 하기도 한다. 뭐만 하면 엠바고 엠바고.. 지겨워 죽겠다. 엠바고는 그저 편의를 위한 장치일 뿐, 곧 죽어도 지키고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닌데 어디서 잘못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를 무슨 맡겨놓은 양 엠바고를 외쳐댄다. 쓰레기 만두 파동 당시에도 언론은 경찰의 엠바고 요청을 그대로 수용했고, 결국 시민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 근데 나라도 당시 출입기자였다면 쉽게 엠바고를 깨지 못했을 것 같다. 모두가 지키는데 나만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 세계는 특히 더 그러하다.
오늘 뜬금없이 엠바고 얘기를 다시 꺼낸 것은 본보 게임기자와 한 프로게임단 고위 관계자가 트위터에서 주고받은 메시지가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다만, 게임단 관계자는 본보 기자가 쓴 단독을 대놓고 저격했다. 그는 기자가 사전 협의없이 기사를 내서 직원들도 기사를 보고 소식을 알았다고 했다. 본보 기자는 게임단이 엠바고를 건 사안도 아니고, 크로스체크까지 마친 기사였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게임단 관계자는 기사 나가기 전에 미리 언질이라도 주는게 관례라고 했다. 그 관례는 도대체 누가 정하나? 관례나 관행은 꼭 지켜야 되는 건가?
나는 경찰과 국회, 청와대, 기재부 등만 맡아봐서 게임 업계에서 보도와 취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노력해서 여러 정보를 얻고 이 정보가 맞다고 확신이 들면 그냥 쓰는 것이다. 내가 이걸 쓸게, 라고 상대방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상대방이 직접 준 정보도 아닌데? 기자들, 너희는 우리의 허락을 맡아야 기사를 내보낼 수 있다는 소리처럼 들려서 좀 황당했다. 무슨 무소불위의 단어처럼 변질된 엠바고가 더 오용되면 이런 모습이 모든 언론취재 영역으로 번지지 않을까. 어찌보면 우리 기자들도 너무 당연하게 관행과 관습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 휘둘리고 흔들리고 하면서 진짜 써야 될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