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룩백' n회차 감상기
**스포일러 왕창
최근 시간이 날 때마다 일본 애니메이션 '룩백' n회차 관람을 하고 있다. 메가박스에서만 개봉한 영화인데, 58분 밖에 되지 않는다. 인기 일본만화 '체인소 맨'으로 2019년부터 지금까지 27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후지모토 다쓰키 작가의 2021년 단편작이 원작이다(역시 단편의 악마..)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처음 극장을 찾았다가 중반부에 이르자 약간 기분이 이상해졌고, 끝날때 쯤엔 거의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울고 나왔다. 여운이 오래 남았다. 사라지지가 않는다. 무모해보이는 무언가를 위해 미친듯이 몰두해본 경험이 있는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치유받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스토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겠다. 주인공 후지노는 초등학생으로, 교내 학보에 4컷 만화를 매주 2개씩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후지노의 만화를 칭찬한다. 너무 재밌고, 아이디어가 좋고, 커서 만화가를 해도 되겠다는 식으로. 그러다 선생님이 후지노를 부른다. 4컷 만화 가운데 하나를 쿄모토라는 친구에게 양보해달라는 얘기였다. 쿄모토는 히키코모리로 학교에 나오지 않고 그림만 그리는 친구였다. 후지노는 등교를 거부하는 겁쟁이가 만화를 어떻게 그리겠느냐며 무시한다.
다음주 학보가 배포되고 후지노는 충격에 빠진다. 방과 후 학교 풍경을 그린 쿄모토의 그림실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쿄모토가 누구냐며 그의 그림과 비교하면 후지노의 만화는 평범하다고 얘기한다. 후지노는 만화에 더 미친듯이 집착한다. 연습장을 사고, 인체 공부를 하며 친구나 가족과의 시간도 포기한채 그림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쿄모토의 실력을 따라갈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되고 결국 만화를 포기한다.
그러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왔다. 선생님은 후지노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전해주라는 거였다. 그의 집에 찾아간 후지노. 집의 문은 열려있었다. 후지노가 2층으로 올라가자 연습장이 무수히 쌓여있는 풍경과 함께 닫혀있는 방이 보였다. 쿄모토의 방이었다. 후지노는 연습장 위에 놓여있던 백지의 4컷 만화에 그림을 그린다. 히키코모리 대회에서 쿄모토가 우승했지만, 결국 외로이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그림을 놓친 쿄모토. 결국 4컷 만화는 쿄모토의 방틈으로 들어가고, 후지노는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간다.
그때 쿄모토가 숨을 헐떡이며 후지노를 따라나왔다. 그러면서 자신의 옷 뒤편에 후지노의 싸인을 받는다. 그만큼 후지노의 열성 팬이라고 했다. 이후 쿄모토는 후지노를 만화의 신이라 치켜세우면서 왜 그림을 그만뒀느냐고 묻는다. 후지노는 자신을 존경한다는 쿄모토 앞에서 '네게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짐짓 허세를 부리며 만화 공모전에 낼 아이디어를 구상하려고 학보를 그만뒀다고 허세를 부린다. 갑자기 비가 오고, 둘은 헤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후지노는 춤도 추고 땅을 힘차게 발로 구른다. 만화를 선택했던 나의 길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후지노는 쿄모토와 팀을 이뤄 만화를 그린다. 후지노가 스토리와 대략적인 인물 그림을 그리면 쿄모토가 배경 작업을 담당했다. 중학생 콤비가 그린 그림은 만화잡지 공모전에서 준입선으로 당선된다. 둘은 100만엔의 상금을 받게 된다. 신난 둘은 그 돈으로 햄버거도 먹고, 군것질도 하고, 영화도 본다. 방안에만 틀어박혀있던 쿄모토는 후지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이후 이 콤비는 7편의 단편을 더 그린다. 아예 연재 만화를 그려보자는 제안까지 들어온다. 하지만 쿄모토는 그 와중에 배경미술을 더 공부하기 위해 미대에 가고 싶어한다. 후지노는 "네 소심한 성격에 미대는 무리다"라고 겁을 주지만, 결국 이 콤비는 헤어지게 된다. 쿄모토는 인근 미대에 진학하고, 후지노는 다른 어시스트를 구해 연재 만화에 착수한다. 후지노는 승승장구한다. 연재만화는 11권까지 나오고, 애니메이션화까지 결정된다.
그날도 후지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토리가 잘 안풀려 고민중이었다. 그러다 뉴스에서 인근 미대에 한 괴한이 침입했다는 뉴스를 듣게된다. 자신이 인터넷에 올린 작품을 해당 학교의 미대생이 베꼈다는 망상에 빠진 인물이었다(쿄애니 방화 사건의 오마주다). 이 사건으로 쿄모토는 사망한다.
검은 옷을 입은 후지노는 눈길을 헤치고 쿄모토의 집으로 간다. 문을 사이에 두고 쿄모토에게 4컷만화를 그려준 일을 떠올린다. 그때 그 그림만 그리지 않았어도, 쿄모토는 죽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떠올린다. 첫 만남 당시 그림을 그리지 않고 둘은 만나지 않게 됐다면. 쿄모토는 결국 미대에 갔고 괴한이 그를 덮친다. 그때 후지노가 나타나 괴한에게 킥을 날린다. 만화를 그만두고 언니를 따라 가라데 도장에 다니게 되었는데, 조깅중에 우연히 이상한 느낌의 남자가 대학에 들어가는걸 따라왔다는 거다. 쿄모토는 감사를 표하며 후지노에게 이름과 번호를 물어본다. 이름을 들은 쿄모토는 과거 초등학생때 학보를 연재한 사람 아니냐며 화색한다. 그러자 후지노는 곧 다시 만화를 그릴테니 어시스턴트가 되어달라고 한다. 모두 후지노의 상상속 이야기다.
후지노가 쿄모토의 방문을 열자 그 곳에는 후지노가 연재하던 만화책이 수없이 쌓여있다. 독자설문서도 놓여있다. 아마 후지노에게 보내던 것이었으리라. 뒤를 돌아보자 후지노의 싸인을 받은 쿄모토의 외투가 걸려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후지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쿄모토의 방에서 가져온 4컷만화 백지를 자신의 화실 앞면 유리창에 붙인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만화를 그린다.
이 만화는 창작자의 수고를 인정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후지노는 교내 학보를 준비하며 항상 책상에 앉아 만화를 그린다. 이후 쿄모토와 함께 공모전 작품을 그릴때도, 단편을 그릴때도, 연재 만화를 그릴때도 항상 책상에 앉아 머리를 짜낸다. 창작이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내가 들인 노력이 얼마만의 성과가 날지, 대중이나 제3자가 얼마나 좋아해줄지 전혀 모른다. 그저 내 자신과 싸우면서 이야기를 꾸역꾸역 만들어 낸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다. 내가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너무 괴롭다.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이어가기 힘들것 같으면서도 또 책상에 앉는다. 그런 후지노와 쿄모토의 모습이 어찌보면 나와도 비슷한것 같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기자시험을 준비한 이라면 누구나 후지노와 같은 경험을 했을 터다. 그래도 내가 글좀 쓰고, 나름 글쟁이로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론사 인턴을 거치고 스터디를 하면서 이 세상엔 정말 고수가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따라갈 수조차 없는 탄탄한 논리의 논술을 매주 써내는 친구를 보면서 놀랐다. 저 정도 해야 기자가 되는 구나 했다. 그래서 더 책을 많이 읽고, 더 많이 써보면서 그 사람을 이기고 싶었다. 그러다 현타가 와서 나는 도저히 안되겠다, 내가 뭐하는 거지, 언론고시 그만둬야겠다 하는 체념도 몇번 했던 것 같다.
입사 이후엔 내가 생각한 기자와 실제 일이 달라 현타도 많이 왔다. 그럴때 가끔 메일이 왔다. "기자님 기사 너무 잘 봤습니다. 저도 언론고시 준비하고 있는데, 꼭 열심히해서 기자님과 같은 기자가 되겠습니다." 너무 부끄러웠다. 저는 당신의 멘토가 될만큼 대단하지 않아요, 하면서도 그래도 내 기사를 보고, 읽고, 공부하며 꿈을 키워가는 사람이 있다니. 쿄모토의 칭찬을 듣고 하늘을 날듯 기뻐하던 후지노의 모습과 비슷했던 것 같다.
다른걸 다 떠나서 기사를 발굴하기 위해 고민하며 노트북 앞에서 매일매일 전투를 벌이는 우리네 기자들의 모습과 책상에 앉은 후지노의 뒷모습이 너무 비슷해서 다시한번 나를 되돌아보는 좋은 시간이 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JwjaFC6zAD0&t=27s
극중에서 후지노는 쿄모토에게 짐짓 허세를 부린다. "사실 만화 말인데, 나 그리는건 전혀 좋아하지 않아. 하나도 안 즐겁고, 귀찮기만 하고. 음침해 보이잖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려도 완성되지 않는다구. 만화는 그냥 읽기만 하는게 나아. 직접 그릴게 못돼." 그러자 쿄모토가 답한다. "그럼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작중에서 후지노는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만화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게 좋고, 사람들이 내 만화를 읽고 재밌다고 해주는게 너무 좋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만화를 그리는게 너무 좋아 죽겠기 때문이다. 만화를 그리지 않고서는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신이 이런지경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가는대로 마음껏 만화를 그리면서 사는 삶이 내가 원하는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쿄모토에겐 짐짓 마음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했지만 만화가 곧 자신이고, 만화없는 자신은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만화를 그리는 것이다.
반대로 내게 되묻는다. "그럼 넌 왜 기사를 쓰고, 매일 그렇게 아둥바둥대며 기자를 하고 싶어?" 난 원래 이런 질문에 바로 답이 나왔는데 요새는 좀 머뭇머뭇하게 된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꿈은 이미 접은지 오래이고. 12년간 기자질을 해와서, 조금 안정이 되어서? 이제 좀 적응이 되어서 할 만해서? 이것도 아닌것 같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던 터에 후지노와 쿄모토처럼 열정적인 인물을 봐서 그런지 마음이 뭉클했던 듯 하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현실에도 분명히 있고, 난 위안을 받는다. 굳이 돈 이런게 아니라도 그저 창작이 좋아서 인생을 갈아넣는 그런 이들을 존경하고 나도 그렇게 성실하고 묵묵한 기자가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