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저는 사건팀장으로 일하면서 후배 두 기수를 뽑았습니다. 사건팀장은 수습기자 교육을 총괄하는 직책입니다. 수습을 뽑는 데도 관여합니다. 저는 전형 과정에 평가자 중 한명으로 참여했습니다. 30대 후반, 기자질 13년 차에 접어든 저는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 기자 지망생들이 퍽 고맙고 대견했습니다. 저도 에너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서류 전형과 필기시험, 1차 면접 등을 통과하고 4차 전형까지 올라온 그들은 마지막 평가과정인 몇 주간의 인턴평가 과정을 훌륭히 끝마쳤습니다. 매일 현장에 나가 사람과 취재원을 만나면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씩 배워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기자로서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는 그들과 함께할 수 있어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인턴 평가가 마무리 될 즈음, 저는 지원자들에게 소감문을 하나씩 받았습니다. 대학생으로 배움에 전념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새내기 예비 기자로서 그들이 느꼈을 감정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내온 소감문은 뭐랄까요, 글쓰기의 정수였습니다.
저는 좋은 글이란 허세를 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감정 과잉으로 독자가 무슨말인지 알아들을수도 없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관념과 상념만 가득해서 글의 주제가 뭔지 모르겠고, 문단별 연결도 잘 되지 않고, 친절한 설명과 배려가 없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닐 것입니다.
기술만 있고 진심이 없는 글은 공허합니다. 저는 10년 넘게 기자를 하면서 좋은 글에 더욱더 목말라졌습니다. 좋은 글은 찾기 힘듭니다. 담백하게 감정을 절제한 상태에서 자신이 뜻하는 바를 분명하고 친절하게 전달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인턴들의 소감문은 자칫 잘못하면 감정 과잉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바, 누군가와 나눈 이야기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좋지만 독자가 그 감정에 이입되지 않는다면 글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인턴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뚝심있게 자신이 경험한 바를 담담히 써내려 갔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저도 기자 초년병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들처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꿈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 능력을 깨닫게 된 셈이겠지요. 그래도 그런 꿈과 패기로 기자를 도전했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그 첫 마음가짐이 평생을 좌우하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기자가 되어 바람과 폭풍을 마주할 때마다, 그 벅찬 첫 다짐이 그들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감상에 빠져있다가 한 인턴의 소감문에서 저는 눈길을 멈췄습니다. 내용 자체를 소개하긴 어렵겠습니다만, 너무나 잘 쓴 글이었습니다. 인턴을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서, 직접 찾아간 현장에서 느낀 점을 바탕으로 기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다짐을 아주 담백하게 써내려간 글이었습니다.
기교나 테크닉은 전혀 없었습니다. 글쓰기 강사가 보면 조금 심심하다고 할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글에서 인턴 기자의 진심을 느꼈습니다. 그와 함께 현장에서 가서 보고 듣고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 나도 이랬지.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살짝 눈물이 나더라고요.
15년 가까이 기자를 하면서 내게 이런 낭만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그저 잊고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쓰는 한줄의 기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수첩을 챙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저는 원숙과 노련함 이라는 명분으로 제 자신의 꿈을 점차 풍화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을 까마득한 후배의 소감문을 보며 깨달았던 기억이었습니다.
글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겸손해야 합니다. 경력이 많다고 글 실력이 매년 좋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를 가지고,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글은 피로합니다. 스스로의 세계에 사로잡히거나 현학에 빠져 거시담론을 지적하고 어려운 철학자의 이론만 끌어오는 글은 쉽지 않습니다.
글을 좀 써봤다는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쉽게 빠집니다. 그래서 글을 쓰면 쓸수록 더 어렵다는 점을 계속 상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후배들, 나보다 어리지만 나보다 글을 잘 쓰는 그런 사람이 정말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기자로서 사는 재미중에 하나는 이렇게 글 잘 쓰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보다 더 잘쓰는 이들에게 더 배울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담은 글이 누군가에게 감동으로 화하고, 그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 정말 기적같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도 멋진 일입니다.
저는 그 후배의 글을 자주 꺼내 읽습니다. 제가 흔들리거나, 지치거나, 기자로서 제대로 일하고 있나 의구심이 들때 그의 글이 저를 응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도 한걸음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저도 그 후배처럼, 좋은 글로서,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