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팀장으로 일할 때, 우연히 혜화라인 경찰서 계장급 이상 경찰관분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론과 경찰이 상생하는 법이 주제였는데 사실 기자로부터 연락이 오거나 직접 기자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응대하는지가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대망의 특강날 서울 혜화경찰서로 찾아갔습니다. 혜화라인을 출입하는 막내기자도 함께 불렀습니다. 계장이나 과장급 경찰 50여명이 참가하니까, 인사라도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특강 시작 전, 저는 단상 앞 책상에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수많은 경찰들 사이로 함께 온 후배 기자가 보였습니다. 저는 좀 놀랐습니다. 그 기자는 혜화라인에 배치된지 한달 정도밖에 안된 상태였는데요. 딱 봐도 경찰 가운데 절반 이상은 다 아는 눈치였습니다. 이쪽 가서 인사하고, 악수하고, 웃으며 대화하고... 전 그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너무나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좀 어색할 수도 있잖아요? 아무리 기자라고 다 성격이 활발하고 외향적인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아가 그에게서 정보를 하나라도 더 듣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기자 중에는 그런 작업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 자체를 사귀는 걸 즐겨하는 부류입니다. 저는 후배 기자가 경찰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에게 있어 취재원과의 첫 만남은 매우 중요합니다.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자랄지는 모르지만, 일단 처음만난 사람과는 전화할 때 좀더 편합니다. 또 그 사람과 식사를 할 수도 있고, 그 분이 다른 취재원을 소개시켜주기도 합니다. 한명 한명 알아갈때마다 기자는 배치된 출입처의 생리와 현황을 좀 더 잘 알수 있게 됩니다. 정보가 점점 더 많이 들어오고, 오히려 기자가 취재원을 도와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출입처를 잘 이해하고, 출입처 취재원을 대부분 다 아는 기자에게 일생일대의 특종 기회가 찾아옵니다. 결국 기자도 사람 장사기 때문입니다.
연차는 낮지만 이런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그 후배를 보면서 전 살짝 질투도 났습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그가 기자인생의 황금기를 스스로 만드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저는 슬슬 중간관리직으로 올라가면서 취재원과 딥하게 호흡하고, 가끔 싸우고 화해하며 더 돈독해지는 단계는 좀 지났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이제 막 기자생활을 시작한 저 후배는 저렇게 더 치열하게 사람을 만날거고, 얼마나 많은 재미있는 정보를 가지고 좋은 기사를 쓸수 있을지 상상도 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특강을 하면서도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그러고보니 비슷한 경험이 두번 더 있었습니다. 모두 다른 후배들입니다. 제가 기획재정부에 처음 배치됐을 때, 11년차 기자였습니다. 처음 왔다고 실국을 돌며 인사를 했는데요. 만나는 국장 과장 모두 저희 회사 후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구누구 기자 잘 있어요? 누구누구 기자와 어제도 저녁했다는 식이었습니다.
기자 사회는 위계서열이 매우 강한 조직입니다. 나이나 경력 상관없이, 연차가 깡패입니다. 선배는 왕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출입처입니다. 모든 선배가 다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배가 선배를 능가하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그러면 선배로서 본을 보여야하는데, 위계서열상 그래야 하는데도, 정작 실전에선 후배가 선배보다 일을 더 잘해서 좀 애매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선배는 후배보다 일을 잘 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나니다. 저는 타 언론사와의 경쟁보다도 열심히하는 후배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취재원과 접촉하고 일해야 하는지가 더 고민이었습니다.
취재원들의 평가는 정확합니다. 저는 후배가 사람을 한명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기자는 이 명제가 정확히 들어맞는 직업입니다. 그 후배는 그만큼 노력을 했고, 저는 배치받은지 얼마 되지 않으니 사람을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니 선후배를 떠나서 제가 그보다 더 노력해서 시간 차이를 최대한 줄이고, 그에게도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기 위해 분발해야 합니다. 저는 1년 남짓한 기재부 출입기간이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놀지 않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남는게 많았습니다. 후배에게서 긍정적인 영감, 혹은 경쟁심을 느꼈고 제 삶도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배에게 참 고맙습니다.
또 한번은 다른 후배에 소위 뻗치기를 나갔을 때였습니다. 뻗치기란 주요 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이나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는 걸 뜻합니다. 모 고위공직자 관련 비리 사건이 터진건데요. 사건의 핵심인 한 최측근 관계자의 집 주소를 알아내서 후배와 함께 출동했습니다. 엄청 추운 겨울날, 저녁도 못먹고 아파트 계단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사유지에서 왜 그러느냐고 지적하는 분이 계시겠습니다. 하지만 뻗치기는 기자에게 없어서 안되는 필수적인 취재 방식입니다.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고, 그들은 언론 노출을 최대한 피합니다. 기자가 알아내려는 것은 개인정보가 아니라 전 국민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니 초인종을 엄청나게 누르거나, 취재원의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않는 적정한 선에서 취재원과 한마디라도 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불법 행위가 아닙니다. 모든 기자라면 해야만 하는, 그런 일입니다.
아무튼 저는 계단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후배는 제게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주변 이웃들에게 해당 호수의 취재원에 대해 묻고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경비실도 다녀오고, 종횡무진하면서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려 하더라고요. 어차피 취재원이 나올거 같지도 않고, 춥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모든걸 포기하고 싶었는데 그 후배의 열정적인 모습에 마음을 다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쓸만한 정보를 건지지는 못했지만, 열정적인 후배의 미래가 밝다는 사실만은 잘 알았습니다.
그 후배는 여러번 제게 부끄러움을 안겨줬습니다. 제가 문재인정부 청와대 출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특수감찰반 민간사찰 의혹이 터졌는데요, 제대로 확인도 취재도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가 쓴 기사를 하루하루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당시 그 후배는 법조팀 막내기자였습니다.
토요일 새벽 2시쯤 됐을까요. 제가 자고있는데 그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통화는 시작됐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배 너무 죄송한데 혹시 특감반 직원들 번호가 있으시냐, 이번 사안은 청와대뿐 아니라 법조도 함꼐 걸려있는 사안인데 너무 취재가 안 되고 있다. 죄송하다. 분해서 아직 퇴근을 못하고 기자실인데 뭐라도 한번 해보려고 선배께 전화를 드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예 저는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해봤자 안되겠지, 어차피 나 말고 모든 언론사 모든 기자들이 다 취재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방관했습니다. 그런 순간에 이번 사안과 직접 관계가 없다고 볼수 있는 그런 후배가 새벽까지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미안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와 나는 별 성과를 이루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후배의 열정에 탄복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는 우리 회사보다 더 큰 방송사로 이직해서 지금도 열심히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훌륭한 후배와 만나면서, 저는 후배를 자주 질투하게 됐습니다. 내가 갖지 못한 능력과 역량으로 각자 나름대로 성실하게 기자 생활을 해 나가는 후배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천편일률적인 기준을 놓고 후배를 깨는 선배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다양한 장점을 최대한 키워줘야 창의성이 증대되고, 그 조직도 커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취재법으로 똑같은 기사를 쓰라고 가르치고, 그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소위 고문관 취급을 했던 우리 언론계도 달라져야 합니다. 명분과 허울보다는 실속을 더 따져서, 안그래도 기렉시트(언론사 탈출)을 노리는 소중한 후배들을 하나라도 더 붙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