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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기사로만 말한다?

by hardy
510913067_23978023368490376_2541853676720023939_n.jpg 대한변호사대회 토론 당시. 벌써 9년 전..


입사 이후 회사 또는 타사 선배 기자들에게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기자는 기사로만 말해야 한다는 것. 당연한 얘기다. 기자는 기사를 쓰는 사람이고, 기사를 통해 불합리를 지적한다. 그러니 취재와 기사 작성에 공을 들이고, 기사라는 형식 안에서 기자 개인의 생각을 피력해야 한다.


근데 요새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우선 제약이 너무 많다. 기사는 분량도 제한돼 있고,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없다. 물론 기자 개인의 주관 등이 들어가지면 여러 조건 등이 붙는다. 그리고 너무 딱딱하다. 문체가 건조해서 내 생각과 의도를 100%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매체 간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 요새 신문을 보면 진보 보수 중도 성향 상관없이 내용이 다 똑같다. 그만큼 하루에 벌어지는 사건 사고, 현안의 중요성이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겠지만 뭔가 다른 내용과 형식의 기사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어떨 때는 모두가 똑같은 신문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건 오늘 우리 신문만의 새로운 기사입니다! 하는 게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연합뉴스를 강력한 레퍼런스로 삼은 채 비슷한 내용으로 신문이 채워진다. 남들과 똑같으면, 휴.. 다행이다. 도꾸니끼(한 매체만 특정 기사를 싣지 못한 것) 안 당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사실 좀 더 자신감이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회사는 편집회의서 이런 지면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이 사안은 중요성이 밀린다고 판단했다는 식으로. 근데 그런 자부심은 사실 별로 없고, 모든 언론이 몇 개의 단독, 몇 개의 기획을 제외하면 일반 기사는 다 똑같이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언론현실에서 과연 기자는 기사로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가? 절대 아닐 터다.




496674128_9879986878720595_3260402608261731326_n.jpg 서울대 강연


매번 느끼지만, 기사 쓰기는 글 쓰기가 아니다. 내가 자유롭게 뭘 쓸 수도 없고, 정해진 형식에 맞춰 내가 취재한 걸 그냥 잘 정리하고 나열하는 작업이다. 기사를 10년 넘게 써왔는데, 난 계속 내 글쓰기 실력이 퇴화하는 것 같다. 내가 가장 글을 잘 썼을 때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기자 시험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매일 2권 이상의 책을 읽었고, 스터디원들과 토론하고, 신문에도 기고하고 하면서 나는 글쓰기의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기사를 쓰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글 쓰기가 일이 되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활자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렇게 13년이 지나니까 글쓰기는 참 어렵고 힘든 작업이 됐다. 기사도 제대로 못쓴다고 누군가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를 사랑해서 기자가 된 나로서는 좀 공포로 다가왔다.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최근엔 블로그도 오픈했다. 지면에 담지 못한 이야기,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이 브런치도 어찌어찌 회사 사람뿐 아니라 언론계 전반에 알려졌다. 최근에도 우연히 타사 후배와 합석을 하게 됐는데, 첫마디가 "브런치 잘 봤어요"였다. 너무 감사하고 황송했다. 근데 그만큼 왠지 눈치가 보였다. 보는 사람을 의식하면 내가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할 텐데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다. 지금은 그 간격을 어떻게 조율할지가 고민인 거고.




497436126_9890301777689105_3553003310487670073_n.jpg 총신대 강연


나는 토론회나 강연도 자주 다닌다. 미천한 나를 불러주는 것도 감사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소통하며 배우는 게 참 많기 때문이다. 서울대와 총신대 등에서 언론에 대해 강연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수습기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연사로 여러 번 참석했다. 매년 열리는 한국변호사대회에선 권리금을 주제로 토론도 했다. 로스쿨 교수님이나 30년 경력의 변호사들 사이에서 그래도 참 재미있었다. 기사만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이 되었다.


나는 대학원 석사 과정도 밟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국가정책학 석사 과정이다. 세종에서 기획재정부 출입할 때 시작했는데, 역시 너무 즐겁다. 기사를 쓸 때마다 얕은 내지 식이 매번 고갈되는 것 같은데, 그 빈자리를 대학원이 채워주고 있다. 경제학 통계학 전반을 새롭게 배우고, 에너지 정책 인구 정책의 문제점과 실태, 개선 방안 등을 공부한다. 정부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 노무나 등 전문직, NGO 직원 등이 주로 다니는 과정이라 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기도 한다.


취재와 기사작성은 기자로서 내 본분이다. 하지만 기자로서 본분에 충실하되,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남들이 하지 않는 생각을 하고, 시야를 쌓으려면 이렇게 취재와 기사작성 말고 더 많은 활동과 노력을 해야만 한다.




496151119_9877008635685086_5900884835823582247_n.jpg 대학원 수업 도중 원우들과


사실 내게 '기자는 기사로서만 말하라'고 조언한 선배들의 속내는 SNS를 하지 말라는 얘기일 거다. 고마운 조언이다. 나는 SNS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 출입처나 회사를 비판하는 글을 쓴 뒤 지운 적도 있다. SNS 금지령이 내려온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SNS가 나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내 기자생활을 엄청나게 도와준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출입처에 등록하면 일단 연락처를 구한다. 이후 출입처 취재원들의 SNS를, 특히 페이스북을 뒤져서 친구신청을 한다. 받는 이도 있고, 받지 않는 이도 있다. 이후 그들의 SNS를 보면서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취미가 뭐고, 최근에 어디를 다녀왔고.. 그들의 일상을 기억해 둔다. 그러다 실제로 현실에서 그들을 만나면 스몰토킹 용으로 써먹을 수 있다.


내 페이스북 친구는 4000명이 조금 넘는다. 경찰, 검찰뿐 아니라 정부부처 공무원, 지자체 공무원, 기자와 기업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다. SNS를 통해 우리는 서로 친밀감을 느끼고, 한 번이라도 더 나를 각인한다. 그래서 난 SNS를 끊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워딩이나 글의 내용은 조심해야겠지만..


기자가 기사를 쓰는 이유는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거겠지만 일단 출입처 등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측면도 있다. 좋은 기사, 남들이 쓰지 않는 단독기사로 기자 개인의 브랜드를 구축해 가면서 출입처에서 인정받고, 정보를 더 많이 얻어서 더 좋은 기사를 쓰는 선순환 구조다. 근데 좋은 기사를 어떻게 맨날 쓸 수가 있나.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든다. 인맥 관리도 쉽지 않다. 그걸 SNS를 통해서 일부 보완하는 전략을 썼고, 나는 꽤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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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기자가 기사로만 말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시대가 바뀌었다. 당연히 좋은 단독과 기획을 쓰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지만, 기사 자체의 영향력만 강조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좀 나대는 것 같아도 사내에 스타기자도 키워야 한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능력을 더 개발시켜야 한다. 고개를 낮추고, 각자의 장점을 더 들여댜봐야 한다.


아직도 정치부 사회부 경제부 아니면 무슨 능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취급하는 그 꼰대 마인드가 우리 언론의 다양성을 죽이고, 창의성을 좀 먹고 있다. 능력을 인정받아 힘든 주요 부서에서 일하는 건 좋은데, 그걸 가지고 다른 기자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나만 힘든 것 같지만 사실 모두가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여도, 그냥 묵묵히 나는 주어진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오만하고 자만해서, 어깨를 들고 다니는 기자 중에 사고를 치지 않은 사람을 잘 보지 못했다.


또 하나. 시간을 쪼개서 대학원을 다니면 일을 안 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뭐라도 자기 계발을 할라 치면 일단 삐딱하게 보는 언론계의 경직된 문화 속에선 유능한 인재를 키워낼 수가 없다. 과거 선배 일부는 인생을 갈아 넣어서 기자질을 했다. 주말도 없이 취재원과 술 먹고 등산하고 그랬다. 너무 대단하다. 근데 그런 기자 생활을 후배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바람직한 기자상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뼈기자들이 취재원이나 후배에게 갑질을 하고 말로가 좋지 않은 경우를 자주 보았다.


기자는 이제 기사를 넘어서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물론 취재와 기사작성이라는 본분은 잊지 말고. 그 과정에서 글쓰기 외에도 SNS와 같은 매체를 활용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과거 선배들처럼 거칠게 일하는 게 유일한 길은 아니다. 판에 박힌 업무 방식을 강요하거나, 물려줄 필요도 없다. 요새는 뼈기자라는 말부터가 좀 어색하게 들린다. 좀더 지혜롭게, 전략적으로 기자생활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기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며, 그에 맞는 환경과 문화가 마련돼야 한다. 기자 자신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처럼 변화하는 언론 환경 속에서, 기자는 더 이상 과거의 틀에 갇히지 않고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젊고 유능한 기자는 다 떠날 것이다. 이미 언론계를 여러 명 떠나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 매체들은 제대로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조직에 적응하지 못한, 도태된 사람으로 애써 포장한다. 그럴수록 위기는 더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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